[책 속에서]
"그 분을 기쁘게 하도록 하도록 힘쓸 때 바로 그 양식이 너를 만족시킬 것이다. 우선 약간이라도 맛보지 그래?" 다른 어떤 음식도 결국에는 여전히 허기가 남을 뿐입니다.
"너는 이제껏 경건의 시간이나 성경연구나 기도 시간을 네 자신의 영적 성장에 필요한 수단으로만 생각해 왔다. 그건 사실이다. 하지만 이 시간이 나에게도 의미가 있다는 것을 잊고 있구나."
"그것들이 죽은 것이고 썩은 것임을 알았지만 그래도 나는 그것들을 사랑했고 그것들이 필요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벽장을 여셔야 합니다. 주님이 그것을 깨끗하게 청소해 주십시오. 제게는 그럴 만한 힘이 없습니다."
"네게 그럴 능력이 없다는 것을 안다. 열쇠만 내게 다오. 그러면 내가 하마."
"어느 한 방을 청소하면 다른 방에 다시 먼지가 쌓이고 이층을 청소하기 시작하면 일층이 벌써 먼지투성이가 되었어. 나는 정결한 마음과 순종의 삶을 계속 유지하느라고 너무 피곤하고 지쳤어. 나는 그것을 감당할 수 없어. 그러나 이제부터는 제가 하인이 되겠습니다. 당신이 저와 이 집의 주인이 되어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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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한일 100번하거나 기도 100번, 이와 같이 나의 노력 또는 행위의 산물로 인해 구원을 받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한적이 있다. 너무 애매모호했기 때문이다. 물론 그 바탕에는 내 비록 구원받기 위해 행위는 하지만 내 마음이 콩밭에 있든 어디에 있든 상관치 말라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순종을 내포하지 않음을 안다. 또한, 내 힘으로 할 수 없는 것들이 있다. 하고 싶지 않음에도 불구, 하게되고 하고 나서는 후회를 하지만, 할 당시엔 나에게 기쁨을 주고 육체적 편함을 주기 때문에 그것들이 썩은 것임을 알지만 버리지 못하고 사랑하는 것들이 있다. 책에서 제시한 바와 같이 이럴 경우, 주님을 나 자신의 주인으로 인정하고 주님께 모든 것을 오픈하고 드리면, 즉 내가 쥐고 있는 것을 놓으면 더 풍성한 것을 누릴 수 있다고 한다.
교회 출석 잘하고, GBS 적극 참여하고, QT, 기도, 말씀, 제자훈련 등을 열심히 해서 외면상으로는 하나님, 예수님이 내 삶에서 우선순위고 주인인 듯이 보이지만, 그 중심에는 하나님이 없고 내가 있음을 안다. 주님께 열쇠를 드린다고 하면서 행위, 외부의 열쇠는 드리지만 내부, 마음의 열쇠는 여전히 내가 꽉 쥐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주님이 내 삶의 주인이란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1) 주님이 주인임을 인정하는 것이다. (2) 주인으로 인정함의 표현으로 순종이 있다. 나는 관리자일뿐이며 따라서 주인의 말을 따라야 한다. 여기서 주인의 말이란 말씀을 통해 그리고 기도를 통한 분별로 보인다. 정의의 하나님을 믿음으로써 당장의 시험 및 고난에도 순종해야 한다.(정의의 하나님, 이 부분은 사실 잘 모르겠다. 말씀에서는 정의로우신 하나님이라고 하기 때문에 믿는다. 그러나, 신은 완벽이며 전지전능하므로, 인간적인 생각으로는 선과 악 양면이 있어야 완벽이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하나님이 천지를 만드시고 악, 죄가 이것의 외부에서 틈을 타 우리에게 왔다고 하는데 이것에 대해서도 어떻게 전지전능한 하나님의 영향력 밖에서 무엇인가 강력한 것(악)이 나올 수 있는가 하는 의문도 든다.) (3) 여기서 더 나아가 주인을 기쁘게 하는 일도 있을 것이다.
나는 왜 주님을 삶의 주인으로 모시는데 어려움을 느낄까? 원인이 무얼까 생각해 본다. (1) 주권자로 인정을 하지 않는 단계에 있다. 대통령이 나와 상관없는 사람처럼, 하나님은 너무나 멀리 떨어져 있는 것처럼 느껴져서 가까이 있는 상사, 친구, 선생님 등이 나의 교제자가 되는 것이다. 비록 내가 지금 하나님께 시간, 재물, 노력은 드리지만 - 물론 이러한 것들도 내가 여유가 있는 한에서 - 교제에 중점을 두는 것이 아니라 '연구'에 더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정말 그러한가 아닌가 하나씩 적용해보면서 연구하고 있는 것이다. (2) 불확실성이다. 예를들면, 기도하기 위해 시간을 만들고, 기도하고, 기다리기 보다는 그 시간에 내가 내 나름의 방법을 강구하고 실행하는 것이 바로바로 결과를 볼 수 있고 확실하다. 현대 사회는 매우 스피드하다. 몇초 단위로 티켓을 못 끊을 수 있고, 몇초를 못 기다려 엘리베이터 닫힘 버튼을 꾹꾹 누르기도 한다. 사람들은 시간이 없다고 아우성이고 나또한 피곤하다고, 바빠서 못했다는 말을 버릇처럼 달고 다닌다. 이러한 환경에서 어떻게 가만 앉아 주님과 시간을 보내겠는가? 또한, 기도의 응답 또는 삶에서 살아있는 하나님에 대해 애매함을 느낀다. 귀에 걸면 귀걸이고 코에 걸면 코걸이처럼, 특정 현상에 대해 어떤이는 하나님께 감사하고 다른이는 좀 더 논리적이고 그럴듯해 보이는 과학적/또는 사회학적 현상으로 해석을 하는 것이다. 결국, 그동안의 살아온 방식, 배운 것, 경험을 기반으로 모든 결정과 행위와 사고의 중심에 내가 있게 된다. 그러고 보면, 나는 현시대의 대세인 실증주의와 경험주의에 많은 영향을 받아 살아왔다는 생각을 해본다. 하지만, 우리가 살아가는데 필요한 것들과 이러한 사상들은 대부분 맞아떨어지는 면이 많이 있지 않은가 싶다.
또다른 예를 들어, 내가 한달 동안(또는 일년) 영어 공부를 열심히 하면, 노력의 성과가 토잌 점수로 나타날 수 있다. 그러나 내가 특정일에 대해 기도를 통해 간구하면 이에 대해 여러가지 결론들이 나올 수 있다. 전혀 응답이 없는 것에 대해 답할 수 있는 말로 '좀 더 진실로 믿음으로써 기도해봐', '네가 아직 준비되지 않아서 그래', '하나님은 주셨는데 네가 모른거야' 등의 말만 해주지 않은가. 도대체 진심의 척도란 무엇이란 말인가? 한 점 의심없는 완벽한 순종, 믿음이란 말인가? 그것이 가능하단 말인가? 이러한 것들이 진실의 단면일 수 도 있고, 또한 진실일 수도 있으며, 내 취향에 맞지 않는 답변으로 인한 거부일 수 도 있다.
그러나, 이 모든 의문들을 제하고 내게 필요한 것이 사실 뭔지 안다. '우선 약간이라도 맛보지 그래?'라고 말씀한바와 같이 이러한 모든 사항들을 뒤로 물리고 사실 나는 조금이라도 맛을 보는 것이 필요하고 지금 그렇게 하고 있는 중이다. 또한, 아무리 그럴듯한 말로 포장해도 진실이 무엇인가를 분별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시리라고 그리고 주님이 내 삶에서 역사하심을 내가 끼워맞추는 것이 아니라 저절로 알고 확신할 수 있는 그날을 소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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