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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3월 6일 토요일

내가 알지 못했던 예수 - 필립 얀시

인물소묘 : 나는 무엇을 보았을까?
왜 예수는 이처럼 명백한 실패자들에게 그토록 많은 투자를 하는가? 나는 예수가 가망없어 보이는 신참자드로가 일하기 좋아했다는 느낌을 떨쳐버릴 수 없다.

죽음 : 마지막 주간
힘이란 아무리 의도가 좋아도 고통을 낳게 마련이다. 그러나 사랑은 스스로 약해짐으로써 그 고통을 자기가 흡수해 버린다. 갈보리 언덕이라는 한 집합점에서 하나님은 다른 이들을 위해 이 한 사람을 단절하셨던 것이다.

그는 무엇이 다른가?
오늘날에도 대다수 그리스도인들은 예수가 언급하지도 않은 동성애에 관해서는 지독하게 비난하면서도 이혼에 대한 예수의 강경한 계명들은 정작 무시하고 있다. 우리는 이처럼 죄의 정의를 다시 내리고 강조점을 바꾸고 있는 것이다.

확대경 중앙에는 대상이 또렷하고 명백하게 잡히지만 그 주변은 점점 더 일그러져 보인다. 내게 예수는 확대경 중앙에 잡힌 대상, 말하자면 초점이었다. 사실, 고통이라든가 섭리와 자유의지 등의 해답 없는 문제들에 매달리다 보면 나는 오히려 모든 것이 혼란스러울 뿐이다. 그러나 예수 그 자신을 바라볼 경우, 고통받는 사람들을 그가 실제로 어떻게 대했는가 관찰할 경우 그리고 자유롭게 진지한 행동에의 부름을 생각할 경우 명료성은 회복된다. 그러면 '하나님이 이미 모든 것을 알고 있는 터에 우리의 기도가 무슨 소용이 있느냐?'라는 질문은 어떤가? 사실 이처럼 지루한 순환론에 빠지면 영적인 권태를 감당하기 어렵다. 예수는 그와 같은 질문에 대해 침묵한다. 그가 기도했기 때문에 우리 또한 기도해야 하는 것이다.

팔복 : 불행한 사람이 정말 행복한 사람

J.B. 필립스는 팔복을 이 세상 기준에 맞춰 노래한다.
약삭빠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이 세상에서 지위가 오를 것이요
무정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는 상처를받지 않을 것이요
불평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는 마침내 제멋대로 갈 것이요
환락에 빠진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는 죄를 갖고 고민하지 않아도 좋을 것이요
노예를 가진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그 노예들이 수고한 대가를 누릴 것이요
유식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어떻게 처신하는지 알 것이요
말썽을 일으키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를 사람들이알아줄 것이다.

우리가 사는 사회는 힘 있고, 외모 좋고, 연줄 많고, 경쟁심이 강한 사람이라야 성공한다고보는 사회다.그런데 그 성공의 요소들이정작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데는 장애가 될 수 있다는 말이다. 그리고 도리어 의지하고, 슬퍼하고, 회개하고, 정말 변화받기 원하는 그런 마음이 하나님의 왕국으로 들어가는 문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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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복은 마음이 가난한자 애통하는 자들에게 현세가 아닌 내세에 상급이 있을것이라는 위로를 준다. 단순히 내세의 약속만을 주는 것이 아니라, 현세에서도 실제로 그렇게 실천함으로써 오히려 더 풍요함을 느낄 것이라고 한다. 킹목사가 비폭력운동을 지속적으로 주장하였다. 비폭력자의 시위에 대해 경찰은 무장공력을 투입하여 무차별 폭력을 가했다. 이 사건은 결국 미국 대중의 민권헌장 가결에 엄청난 지지를 이끌어내었다.
확실히 마음이 가난한 자, 애통하는 자 등 약자들은 마음이 더 온유하고 자신이 그러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에 대한 배려가 더 깊다. 그래서 그들이 더 복이 있다고 얘기하는 것인가.
이 세상은 돈을 더 많이 가진자, 승리하는 자, 똑똑한 자가 복이 있는데 성경은 다른 말을 한다. 교회에서도 지속적으로 성공하라고 말하지 않는가.

약자가 도태되는 것이 당연하고, 나의 일을 위해 그들을 무시하는 것쯤은 당연하게 여겼는데..그들에게 좀 더 주의를 기울이는 마음을 가지자. 그리고 상처 받지 않기 위해 무정하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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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시지 : 가혹하고 엄격한 말

오히려 인간은 인간적인 상식과 중용을 더 좋아하며, 예수의 황금률보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황금률에 더 솔깃해 한다.

왜 우리가 걱정하고 두려워하지 말아야 하는가? 백합과 들에 피어나는 풀들조차 아름답게 꾸미는하나님께서 우리를 보살펴 주시기로 했기 때문이다. 예수는 톨스토이가 그랬듯이,우리가 온전한 존재가 되는 데 실패해서 절망하고, 그 절망으로 인해 깊은 번민에 빠지기를 결코 원하지 않았다. 그렇게 되라고 산상수훈을 설교한 것이 아니었다. 예수는 우리에게 도달하기 위해서 끊임없이 노력해야 할 하나님의 이상을 나누어준 것이다. 복음의 계명을 적당히 우리 수준에 맞춰서 하나님께 다가가려는 어떠한 노력도 소용없는 것임을 알려준다. 산상수훈을 또 하나의 형식화된 율법으로 변질시키는 것은 가장 큰 비극이다.
우리가 절대적인 이상에 도달하지 못하는 존재임을 절감했다면, 우리에게 하나님의 그 크신 자비로운 품 이외에 다른 안식처는 결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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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차피 완벽히 하지 못할 것이라면 차라리 하지 않는 것을 택하는 것이 마음이 편하다. 하나님은 이상에 도달하지 못한다고 해서 괴로워 하거나, 아예 아무런 시도도 안하는 것을 바라지 않을 것이다. 그의 말씀은 너무나 이상적이라서 적당히 세상과 타협하며(좋게 말하면 중용이지 않은가!) 살아가는 것이 현명하게 보인다.
하나님은 저자가 말하듯이, 우리가 얼마나 부족한가를 깨닫고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기를 바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