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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5월 30일 토요일

노무현 대통령의 편지

대통령의 편지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
오늘은 어버이날입니다.
저에게는 큰 절을 두번 하는 날입니다.
한 번은 저를 낳고 길러 주신 저의 부모님께 감사 드리는 절입니다.
또 한번은 저를 대통령으로 낳고 길러 주시는 국민 여러분께 감사 드리는 절입니다.
저는 경남 김해 산골에서 태어났습니다.
판자 석자를 쓰시는 아버지와 성산이씨셨던 어머니의 막내로 태어났습니다.
세속적으로 보면 저도 크게 성공한 사람이지만 돌이켜 보면 부모님이 많은 것을 주셨기 때문에 오늘이 있었던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가난을 물려주셨지만 남을 돕는 따뜻한 마음도 함께 물려 주신 아버지셨습니다.
매사에 호랑이 같았던 분이지만 바른 길을 가야 한다는 신념도 함께 가르쳐 주신 어머니셨습니다.
'내가 아프면 나보다 더 아픈 사람, 내가 슬프면 나보다 더 슬픈 사람, 내가 기쁘면 나보다 더 기쁜 사람,'
오늘 그 두 분에게 하얀 카네이션을 바칩니다.
국민 여러분!
대통령의 어버이는 국민입니다.
국회의원의 어버이도 국민입니다.
한 인간을 대통령으로 국회의원으로 만든 사람은 바로 국민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점에서 정치개혁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여러분 마음먹기에 달린 일입니다.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나온다'라고 명시된 대한민국 헌법 제1조는 이 나라의 정치인이라면 누구나 군말없이 따라야 하는 지상명령입니다.
여러분의 관심 하나에 이 나라 정치인이 바뀌고 여러분의 결심 하나에 이 나라의 정치는 바뀌게 되는 것입니다.
그 관심과 결심 또한 그리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어버이의 마음을 가지시면 됩니다. 어버이는 자식을 낳아 놓고 '나 몰라라'하지 않습니다.
잘 하면 칭찬과 격력를 해주고 잘못하면 회초리를 듭니다.
농부의 마음을 가지시면 됩니다. 농부는 김매기 때가 되면 밭에서 잡초를 뽑아 냅니다.
농부의 뜻에 따르지 않고 선량한 곡식에 피해를 주기 때문입니다.
나라와 국민을 위해 일하라는 국민의 뜻은 무시하고 사리사욕과 잘못된 집단이기주의에 빠지는 일부 정치인.
개혁하라는 국민 대다수의 뜻은 무시하고 개혁의 발목을 잡고 나라의 앞날을 막으려 하는 일부 정치인.
나라야 찢어지든 말든 지역감정으로 득을 보려는 일부 정치인.
전쟁이야 나든 말든 안보를 정략적으로 이용하는 일부 정치인.
이렇게 국민을 바보로 알고 어린애로 아는 일부 정치인들에게 국민여러분과 제가 할 일이 있습니다.
제가 할 일은 어떤 저항과 어떤 어려움이 있더라도 대통령의 의무인 대한민국 헌법 제1조를 지키는 것입니다.
살아 움직이는 헌법이 되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여러분께서 하실 일은 어버이의 마음을 가지시고 농부의 마음을 가지시는 것입니다.
국민 여러분! 저에게도 어버이의 회초리를 드십시오.
국민여러분의 회초리는 언제든지 기꺼이 맞겠습니다.
아무리 힘없는 국민이 드는 회초리라도 그것이 국익의 회초리라면 기쁜 마음으로 맞고 온 힘을 다해 잘못을 고치겠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힘 있는 국민이 드는 회초리라도 개인이나 집단의 사적인 이익을 위해 드는 회초리라면 매를 든 그 또한 국민이기에 맞지 않을 방법은 없지만 결코 굴복하지 않겠습니다.
'너 내 편이 안되면 맞는다'라는 뜻의 회초리라면 아무리 아파도 굴복하지 않겠습니다.
국민 여러분의 큰 뜻을 위배하라는 회초리라면 결코 굴복하지 않겠습니다.
제가 굴복하면 저에게 기대를 걸었던 많은 국민들은 기댈 데를 잃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굴복하면 저에게 희망을 걸었던 많은 국민들은 희망을 잃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국민 여러분!
그런데 하나 경계해 주실 것이 있습니다.
바로 집단이기주의입니다. 저는 대통령이 되기 전, 사회적 약자를 대변하는 인권변호사로서 살았습니다.
그래서 개인적으로는 힘있는 국민의 목소리보다 힘없는 국민의 목소리가 더 크게 들리는 체질입니다.
그러나 대통령으로서 국정을 할 때는 그 누구에게 혹은 어느 한 쪽으로 기울 수 없습니다.
중심을 잡고 오직 국익에 의해 판단할 수 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대통령이 중심을 잃는 순간, 이 나라는 집단과 집단의 힘겨루기 양상으로 갈 것이기 때문입니다.
정치와 통치는 다릅니다.
비판자와 대통령이라는 자리는 다른 것입니다.
저는 인기에 연연하지 않고 국익이라는 중심을 잡고 흔들림없이 가겠습니다.
국민 여러분!
저에게는 희망이 있습니다.
어떤 어려움이 있더라도 꼭 이루고 싶은 희망이 있습니다.
그 하나는 이익집단은 있지만 집단이기주의가 없는 대한민국입니다.
각자의 이익을 추구하지만 국가와 민족 앞에서는 한 발 물러서는 대한민국.
좀 더 가지고 덜 가진 것의 차이는 있지만 서로 돕는 대한민국.
동(東)에 살고 서(西)에 사는 차이는 있지만 서로 사랑하는 대한민국.
바로 화합으로 도약하는 대한민국입니다.
다른 하나는 세대 차이는 있지만 세대 갈등은 없는 대한민국입니다.
자식은 부모세대가 민주주의를 유보하며 외쳤던 '잘 살아 보세'를 존중하고 부모는 내 아이가 주장하는 '개혁과 사회정의'를 시대의 메시지로 받아들이는 대한민국.
자식은 부모에게서 경험을 배우고 부모는 자식에게서 새로운 시대의 흐름을 배우는 대한민국.
자식은 밝게 자라게 해 준 부모에게 감사하고 부모는 자식의 밝은 생각에서 새로운 것을 배우는 대한민국.
바로 사랑으로 행복한 대한민국입니다.
국민 여러분!
이 세상을 떠날 때 가장 후회스러운 것은 높은 자리, 많은 돈을 갖지 못한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부모님을 한 번 더 찾아뵙지 못한 것, 사랑하는 아이를 한 번 더 안아 주지 못한 것, 사랑하는 가족에게 더 잘해주지 못한 것이 가장 후회스럽답니다.
저도 IMF 후 국가의 위기를 극복하는데 도움이 되고자 전국의 노동자들을 설득하러 다니느라고 어머님의 임종을 지키지 못했던 일이 아직도 가슴에 남아있습니다.
저의 이 편지가 부모님의 은혜를 한 번 더 생각하는 계기, 대한민국이라는 가족공동체를 한 번 더 생각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효도 많이 하십시오.
우리 모두의 가슴에 마음으로 빨간 카네이션을 바치며...
2003년 5월 8일 대한민국 새대통령 노무현

2009년 5월 20일 수요일

워싱턴 DC 여행 정보 - 지도, 공항, 지하철 맵, 호스텔

ㅇ 관광
- 백악관, lincoln memorial, 국립박물관/스미스소니언 박물관(Smithsonian Museums)/자연사 박물관, pentagon, jefferson memorial, mount vernon(조지워싱턴 생가), 포토맥 강변 산책

ㅇ 지하철 노선
ㅇ 공항 : 워싱턴에는 3개의 공항이 있음.
Dulles International Airport(IAD) : 한국에서 항공편을 이용할 경우에 대다수 항공편 도착
i) 도심과 거리가 떨어져 있기 때문에 도착후에 택시 이용 : DC 도심까지 대략 30분정도 걸리며 팁을 제외하고 $45정도
ii) Washington flyer라는 셔틀버스 이용
- 지하철 West Falls Church Metro Station 까지 편도 $9, 왕복 $16
- 도심으로 가는 버스는 30분간격, 자세한 버스시간표는
Washington Flyer(http://www.washfly.com/)



ㅇ 유스 호스텔 (http://www.hostelsweb.com/)

Hostelling International Washington D.C.
ㅇ Metro Center 역, 11th St 상에서 New York Ave Street 지나서 K Street을 지나면 바로 있음(3 블럭)
ㅇ 관광 장소와의 접근성
- White house 걸어서 5 블럭(15분 정도)
- National Gallery of Art 걸어서 15 블럭(30-40분 정도)
ㅇ 호스텔 정보
- 무선인터넷 가능(속도 느림, PW는 프런트에 요청)
- 방 카드가 마그네틱 쉽게 손상, 잘 안되어서 매일 한번씩 프런트에서 recharge 해야함.
- 아침식사 : $2, 별로임, 2 블럭 거리 스타벅스에서 $9정도의 breakfast special 나음(과일 샐러드, 커피, 베이글 에그)

담양 관광

http://www.damyang.go.kr/tourism/

죽녹원
ㅇ 5만여평에 이르는 대나무밭 임야를 군이 매입하여 대나무 축제 무대로 활용
ㅇ 죽림욕을 즐길 수 있는 오솔길, 정자
ㅇ 광주 두암동 정류소→국도 15호선을 따라 담양정류소에서 국도 29호선을 이용, 향교교 건너편에 위치

관방제림
ㅇ 천연기념물 제366호
ㅇ 나무의 종류로, 푸조나무(111그루), 팽나무(18그루), 벚나무(9그루), 음나무(1그루), 개서어나무(1그루), 곰의말채, 갈참나무 등 약 420여 그루/천연기념물로 지정된 구역안은 185그루의 오래된 큰 나무 있음.
- 큰 나무는 300∼400년 전에 심어지고, 작은 것은 철종 5년(1854) 황종림 담양부사가 심은 것이라 함.
ㅇ 담양의 관방제림은 홍수피해를 막기 위해 제방을 만들고 나무를 심은 인공림으로 우리 선조들의 자연 재해를 막는 지혜를 알 수 있는 역사 및 문화적 자료로서의 가치가 크므로 천연기념물로 지정·보호

가마골
ㅇ 용추산 중심 사방 4km 주변을 가마골이라하며, 영산강의 시원으로 유명한 용소가 있음
ㅇ 용소는 계곡을 따라 흐르는 시냇물이 이곳 암반으로 형성된 물목을 통과하는 동안 억만겁의 세월을 통해 암반을 깍고 깍아 마치 용이 꿈틀거리며 지나간 자국 마냥 홈을 이룸. 이 홈이 중간에서 석질이 강한 암반에 걸려 이를 뚫지 못하자 공중으로 솟구쳐 오르고 분수처럼솟구친 물이암반 밑에 쏟아져 시퍼런 용소를 이룸.
ㅇ 한국전쟁 격전지 중 가장 치열하고 처참했던 역사의 현장이기도 함

- 1코스 : 물놀이장-쉬어바위-신선대-치재산 정상-임도-가족캠프장(1시간30분)
- 2코스 : 가족캠프장-임도-헬기장-산불감시초소-관리사무소(1시간 30분)
- 3코스 : 시원정-신선봉-용추사-용연1,2폭포-용연주차장(2시간 30분)
- 4코스 : 관리사무소-산불감시초소-사령관동굴(사령관계곡)-출렁다리
- 5코스 : 오정자재-용추사-용연1,2폭포-용연주차장(3시간)



용흥사 계곡
ㅇ 담양읍에서 북으로 8㎞쯤 가다 바심재 왼쪽으로 용흥리 마을 지나 2㎞쯤 올라가면 용흥사 계곡에서 흐르는
물을 담수하는 저수지가 있으며, 계곡을 따라 올라가면 용구산 중턱에 자리잡고 있는 용흥사 절이 있음.
ㅇ 속설에 의하면 조선 영조의 어머니인 창평인 최복순 여인이 이 절에서 기도를 하여 영조를 낳고 이 절
이름을 용흥사라 하고 산 이름도 용구산에서 몽선산이라 고쳤다고 함.
ㅇ 용흥사 계곡은 단풍 나무와 푸른 송림사이에 기암괴석이 어우러져 있음. 또한 용흥사 계곡 사이로 붉게
물든 가을단풍은 다른곳 에서는 볼 수 없는 기이한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다함


캄보디아 - 영역, 기후, 종족, 언어

I. 종족
ㅇ 인구의 90%이상이 크메르인, 나머지는 중국인, 베트남인, 무슬림(Cham), 고산지에 거주하는 Non-Khmer(Khmer Loeu)
II. 언어
ㅇ 크메르어 : 인구의 90% 이상이 크메르인으로 크메르어 사용(공식 언어)
ㅇ 프랑스어 : 한때 인도차이나 정부의 언어였으며, 일부 나이든 캄보디언들이 사용. 또한 프랑스정부에서 후원하는 일부 학교나 대학의 경우 지도용으로 사용
ㅇ 영어 : 젊은 세대 또는 사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주로 배우려고함. 대도시나 여행센터에서는 영어가 많이 사용되며 많은 학교에서 가르치고 있음. 영어권 관광객이 많이 오는 것도 원인임. 심지어 산간외지에서도 젊은 세대들은 영어 일부를 사용함

III. 영역
ㅇ 영역 : 181,035km²(참고 : 한국 223,170km²)
ㅇ 북서쪽에 태국, 북동쪽에 라오스, 동쪽부분에 베트남 위치
ㅇ lacustrine plain : Tonle Sap (Great Lake) 침수에 의한 평야, 건기에는 2,590km², 우기에는 24,605km², 벼농사에 적합
ㅇ 국토의 75%가 해수면레벨에서 100m 정도(또는 그 아래)에 위치함.
IV. 기후
ㅇ 기후 : 21° ~ 35°C,
ㅇ 특징 : 열대몬순
- 남서 몬순 : 우기(20°까지 떨어짐), 5월~9월
- 북동 몬순 : 건기(40°까지 올라갈 수 있음), 10월~3월
- heavy 강우 : 9월 ~ 10월
- Best months : 11월 ~ 1월
V. 링크

캄보디아 - Tuol Sleng Genocide Museum

1. 개요
- 캄보디아 수도 프놈펜 위치
- 크메르 루즈 정권(1975~1979)에서 Security Prison 21(S-21)으로서 구류, 심문, 비인간적인 고문, 살해로 악명 높음
- Tuol Sleng 은 크메르어로 독성있는 나무들의 언덕이란 뜻임.

[뮤지엄 외관] [건물 경계에 있는 레이저 선]


2. 히스토리
- Tuol Svay Prey 고등학교를 크메르루즈 정권이 들어서고 4개월 후인 1975년 8월 감옥으로 바꿈. 건물 주변은 전기 철조망으로 교실은 작은 독방들, 심문하는 방으로 바꿈.
- 1975년에서 1979년까지 약 17,000명의 사람들이 투옥됨. 초기에는 Lon Nol 전정권, 군인, 정부 관계자뿐 아니라 의사, 학자, 선생, 학생, 공장 노동자, 승려, 엔지니어 등을 투옥하고 심문함. 정권 후반기에는 당 리더쉽 패러노이아는 결국 당 활동자들 및 그들의 가족의 숙청으로 이어짐. 물론 대부분의 희생자들은 캄보디언이었으나 베트남인, 인디아, 파키스탄, 미국인, 뉴질랜드 등의 외국인도 있었음.
- 1980년 감옥은 크메르 루즈 정권하에 있었던 일을 기념하기 위한 뮤지엄으로서 재오픈됨.



[조잡스럽게 중간에 벽돌만 쌓아 놓은 독방들] [Skull Map : 300개의 해골로 구성된 맵]

3. 감옥생활
- 새벽 4:30에 옷을 벗기고 조사를 실시함. 흉기 등 자살할 수 있는 도구를 소지하고 있는가를 조사하기 위함임.
- 한번에 4스푼 정도의 쌀죽과 스프를 하루에 두 번 제공함.
- 모든 행동은 교도관에게 승인을 받아야 했음. 허가 없이 물이라도 마시게 될 때는 극심한 구타를 당함. 때로는 똥이나 오줌까지 먹도록 강요당함. 의사가 있었지만 훈련받지 않고 단지 심문을 위해 살아있게만 만드는 역할을 함.
- 1975년에는 시체를 감옥 주변에 묻었으나 1979년 말에는 묻을 장소가 동이 나 프놈펜에서 15km 정도 떨어진 Choeung EK에 묻음.

4. 생존자
- 17,000 투옥된 사람들 중 약 12명의 생존자만 있는 것으로 알려짐. 4명은 여전히 살아있는데 그들 중 2명은 화가로서 폴포트 지시아래 Tuol Sleng에서 일어난 일들을 그림. 그들의 그림은 뮤지엄에서 볼 수 있음.

5. S-21 Staff
- 1,720명의 스태프가 있었는데 약 300명 정도가 심문 등을 하는 스태프이고 나머지 1400명정도는 대개 어린아이들로, 그들의 부모는 감옥에 갇히고, 그들은 감옥에 음식을 대기 위해 일을 함.
- 감옥 소장은 Khang Khek Ieu로 폴포트와 가깝게 일했던 수학교사였음.

('09.1.25~31) 캄보디아 선교 관련 느낀점 등

[준비시]
선교에 대한 큰 기대감은 없었다. 단지 한 번도 해보지 않은 것에 대한 경험을 하는 것 그리고 그 땅에 대한 긍휼한 마음을 가질 수 있도록 기도하는 마음으로 길을 떠났다. 대부분 선교 갔다 온 사람들의 얘기를 들어보면 ‘좋았다. 은혜 많이 받았다’이다. 나도 사실 그런 기대도 어느 정도 하고 간 것이 사실이다. 갔다 오면 내 삶이 변화되지 않을까. 그들의 빈곤, 아픔 등을 보면 크게 감동받아 내 삶이 변화되지 않을까.
영화를 많이 봤나보다. 현실은 단순한 일상의 반복이며 또는 무디어진 감성의 결과인지 또는 노력 없는 성과를 바라는 이기적 마음으로 인지 내 삶은 선교 후에도 그다지 크게 변하지 않는다. 단지 성과라면 선교란 이런 것이구나 하는 구체적인 실상을 보게 되었다는 점일 것이다. 그래서 열방을 위해 기도할 때 다른 사람보다 좀 더 가슴에 와 닿는다는 것 정도, 그리고 선교 헌금을 해야겠다는 작정 정도가 변화일 것이다. 또한 선교 자체가 아니라 준비하면서 그리고 그 나라에 가서 생활하면서 동역자들과 한층 더 가까워진 것이 성과로 볼 수 있다.
[현지: 캄보디아 사역시] 나는 어린이팀과 의료팀 중 의료팀을 지원했다. 의사들을 제외하고 청년들이 할 수 있는 일은 대개 처방전에 따라 약을 조제하고 전달하는 것이다. 즉, 현지인과의 접촉 없이 분업화된 공장에서 일하는 것처럼 한 테이블에서 약 조제 및 포장이라는 단순반복작업의 일련과정을 하게 되었다. 그러한 단순반복적인 일들에서 그 나름에서의 즐거움 및 의미를 찾지 않았다면 분명 선교에 대한 회의감에 빠졌을 것이다.
두 가지 의식 전환 과정이 필요했다. 첫 번째는 누군가는 지루하고 단순반복적인 일을 해야 한다는 생각이다. 그것이 비록 보이기에 지루하고 빛도 없어 보이지만, 반드시 현지인들에게만 하는 것이 선교가 아니라 팀 안에서 누구도 맡기 싫어하는 역할을 감당하는 것도 하나의 섬김이 될 수 있다고 동기부여를 하는 것이다. 두 번째는 일 중심에서 교제 중심으로 나가는 것이다. 나는 일하러 온 것이 아니라 선교를 하러 온 것이다. 그러나 평소의 습관이 그대로 남아 얼마나 빨리 처리할 수 있는가에 포커스를 두고, 일 관련 이외에는 대화도 잘 하지 않는 나를 보게 되었다. 물론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일을 점점 더 효율적으로 처리하면서 시간적으로 여유가 생긴 점도 있었지만, 내가 할 수 있는 한에서 의료팀 및 현지 통역인 등 주변인과 교제를 많이 하려 노력했다. 그래서 정말 즐겁게 일했고 또한 나중에는 통역하는 애들과 서로 연락처 교환 및 지속적인 연락을 취하고 있다.
[기타]
기억에 남는 것은 땅밟기이리라. 만평이나 되는 땅을 7바퀴를 돌면서 나중에는 지쳐 정신이 혼미해지면서 내가 무슨 기도를 하고 있는지 의식하지도 못한 채 중얼거리며 걸었던 기억이 난다. 피로 물든 이 땅을 긍휼히 여겨주시어 이 땅에 세워질 학교를 위해 재정적, 인적자원을 충족시켜달라고 기도하면서, 선교사님이 말씀하신 자신의 인생에서 시간의 십일조를 드리라는 것에 대해 이것저것 고민을 했었다. 즉, 실질적으로 필요로 하는 곳은 외면한 채 내가 가진 것을 하나도 포기하지 않고, 있는 자리에서 헌신하겠다고 하는 나를 보면서 ‘그렇다면 나는 어떡해야 하나‘하는 해결이 보이지 않는 심정을 가지고 걸었던 그 기억들....




또한, 내가 이 사역을 통해 얻은 것이 있다면 그것은 공동체감이었을 것이다. 늘 어느 정도 일정한 거리를 유지한 채 너도 좋고 나도 좋은 나이스한 관계가 아니라 일 때문에 짜증도 내고 화도 내면서 그 사람의 한꺼풀 벗긴 모습을 잠깐이라도 보고 좀 더 깊은 곳에 닿았다는 그런 느낌이 들었다. 물론 그것은 일시적이라 다시 일상으로 돌아왔을 시는 덮여져 있게 된다.
다른 하나는 준비하면서 그런 생각을 했다. 출발 마지막 한달 전은 거의 매일 나와서 준비를 하는 것을 보게 되었다. 그러함을 통해 농담처럼 직장 일을 소홀히 하게 되는 부분이 어쩔 수 없다고 말하는 부분을 보고 공감이 되지만 사실 문제가 있다는 생각을 더 많이 했다. 일주일간의 해외선교를 하기 위해 우리가 평생을 같이 할 직장, 가정에서의 선교를 잃어버리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절제와 효율적인 시간사용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되었다

2009년 5월 15일 금요일

로마인 이야기_카이사르 상

로마인 이야기 카이사르 상을 이구구,, 몇 달에 걸쳐 읽었다. 찔끔찔끔 읽어도 괜찮은 것이 전체가 소이야기들로 짜여져서 그런가 보다. 어쨌든 요 며칠 가속도를 내어 읽어 다행히 이해가 가기 전엔 카이사르 하권까지 끝낼 수 있을 것 같다.
카이사르 상은 카이사르의 유년시절부터 갈리아전쟁기로 구성되어 있고 갈리아 전쟁기 부분이 크게 2/3정도를 차지한다. 다음과 같은 말처럼 40세 이전의 그는 특별히 두각을 나타내지도 않고 오히려 내겐 바람둥이에 허풍쟁이 한량처럼 느껴진 면이 많다. 그러나 아우구스투스처럼 잘생긴 외모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많은 여자들 사이를 돌아다니면서도 미움을 받지 않고 사랑을 받는 그의 능력, 어마어마한 빚을 지면서도 거리낌 없던 그 태연자약 이러한 것들은 충분히 부러워할 만하다.


카이사르는 40세가 지나서야 ‘출세’했다. 전기를 쓰는 사람에게 이보다 더 곤란한 존재는 없을 것이다. 게다가 카이사르는 ‘출세’하자마자 세계의 중심에 서게 되었다. 아니, 세계가 그를 중심으로 돌기 시작했다. 이런 경우는 아주 드물다. 드물기 때문에 곤란함은 갑절로 늘어난다. (115p)
그는 돈에 굶주려 있었던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남의 돈을 자기 돈으로 만들어버릴 생각도 없었다. 단지 남의 돈과 자기 돈을 구별하지 않았을 뿐이다. 그의 일거수일투족은 모든 사람이 자기를 돕기 위해 태어났다는 전제에서 출발했다. ~ 그럴 때의 그 양반은 저 유명한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태연자약 바로 그 자체였다. (340p)


9년여에 걸친 갈리아 정복전쟁, 좀 심심할 만 하면 도버해협을 건너 영국한번 건드려보고, 라인강을 건너 게르만인을 위협했던 그의 총사령관으로서의 자질은 놀랄만하다. 나는 카이사르에 대한 역사가 아닌 소설을 읽고 있다. 물론 피정복자인 갈리아인 입장에서라면 조용히 자기네들끼리 지지고 볶고 살고 있는 평화로운 그네들을 로마화 (문명화)란 명분으로 건드린 카이사르가 마치 우리의 식민지화와 대립된 문명화를 외친 일제의 놈들과 같은 부류일지도 모른다. 관점에서 벗어난 얘기지만 일예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오다 노부나가가 못 이룬 전국시대를 통일한 인물로, 우리나라에서는 조선시대 임진왜란을 일으킨 ‘전쟁광’으로 불리지만 일본에서는 ‘영웅’으로 불린다. 카이사르에서 내가 초점을 맞추는 것은 로마제국화의 환경에서 드러나는 그의 전략가, 정치가, 사상가로서의 자질이다.

내 생각에는 전투도 오케스트라 연주회와 비슷한 게 아닌가 싶다. 무대에 오르기 전에 70퍼센트 정도는 이미 결정되어 있고, 나머지 30퍼센트는 무대에 올라간 뒤의 성과로 정해진다는 점에서 그렇다. 무대에 오르기 전에 100퍼센트가 결정되지 않으면 안심하지 못하는 사람은 평범한 지휘자에 불과하다고 생각한다. 전투도 연주와 비슷해서 오랜 준비를 거친 끝에 단 몇 시간으로 승부가 결정난다. (459p)
남이 어떻게 생각하든 개의치 않고, 또한 공적으로 이룩하고 싶은 무언가를 갖지 않은 사람은 실질적인 은둔 생활로 일관해야 인간 사회에 해를 끼치지 않는다. 고대에는 이런 생활방식을 에피쿠로스주의(쾌락주의)라고 불렀다. (495p)


사랑도 명예도 권력도 돈도 아닌 현재의 공화정체제를 타도하고 새로운 질서를 수립하려는 이상적 신념을 위해 살아간 그의 삶은 참 쿨하며 그는 진정 고독하고 오만한 천재이다. 크라수스를 무찌른 수에나스의 뛰어남을 질시한 파르티아 왕은 오히려 그를 죽였다. 자 뛰어난 카이사르여, 술라의 숙청과 같은 일들이 다시 일어날까? 독재체재에 심한 알러지 반응을 보이는, 당신을 두려워하는 원로원들을 그대는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이미 엎질러진 물이다. 이 강을 건너면 인간 세계가 비참해지고, 건너지 않으면 내가 파멸한다.“(537p 루비콘 강을 건너면서)

Revolutionary wealth

[책 속에서]
제1부 혁명, 29p
수술 후 남성에서 여성으로 바뀐 성전환자인 월 스트리트 컴퓨터 전문가 리키 앤 윌킨스는 “그 또는 그녀로 사람을 구분하는 행위 그 자체가 억압적이며,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는 사람을 하나의 역할에 억지로 끼워 맞추는 일이라고 주장한다.

제5부 지식에 의한 신뢰 중 합의(Consensus), 186p
우리가 진실이라고 부르는 상당수 혹은 대부분은 합의(Consensus)에 의해 옳은 것으로 인식된 것이다. ‘모든 사람들이 X를 진실이라고 알고 있다. 그러므로 X는 진실임에 틀림없다’는 식이다. 우리는 보통 의심 없이 가족, 친구, 동료와 주변 문화로부터 합의된 진실을 받아들인다. 무리의 뒤를 쫓아 모두가 호수로 뛰어들어 빠져죽는 나그네 쥐, 레밍의 시대정신을 형성하는 것이다. 무리를 쫓으면 생각할 필요도 없으며 집단이 믿는 진실은 논란의 여지도 없다. 틀려도 자신의 어리석음이 드러나지 않는다. 똑똑한 사람들조차 그렇게 믿기 때문이다.

제6부 프로슈밍, 298p
사지마비 환자가 친구들에게 전화로 아무런 대가 없이 통찰력 있는 조언을 해주는 일과 정신과 의사가 시간당 100달러를 받고 제공한 치료가 동등할까? 만일 그의 전화 충고가 자살하려던 한 사람의 생명을 구했다면 그것을 어떻게 가치로 환산할 수 있을까? 혁명적인 부는 단순히 돈의 문제가 아니다.

제8부 자본주의의 미래, 367p
공급이 유한하다는 전제야말로 자본주의 경제학의 근간이며, 수요와 공급의 법칙보다 더 신성시되는 자본주의 법칙은 없다. 무형자산의 증식에는 사실상 한계가 없다. 하지만 2가지 종류의 무형자산이 사실상 무한히 공급될 수 있다면 무한한 무형의 경제가 자본주의와 공존할 수 있을까?

제10부 지각 변동 중 시간을 둘러싼 충돌 493p
만약 북한이 핵무기와 그것을 운반할 수 있는 미사일을 개발하고 있다면 자 회담의 협상 시간을 오래 끌수록 북한의 기술은 더욱 발전하게 된다. 한반도 분단선 양측에 대한 이 모든 이해관계로 인해 핵 협상은 일종의 저돌적 탱고로 변질됐고, 그 경연에서 승자는 가장 느린 템포로 춤을 춘 팀이 될지도 모른다.
일부 사람들은 북한이 양국의 결혼에 핵무기를 예물로 들고 올 수도 있으니 오히려 기뻐해야 한다고 말한다.

두달여에 걸쳐 읽었다. 실제 시간으로 치면 하루도 되지 않을 것으로 본다. 시간, 공간, 지식이 어떻게 영향을 미칠 것인지에 대해 얘기한다

The Present - Spencer Johnson

[책 속에서]
'The present' 는 당신이 당신에게 주는 선물로, 당신만이 'The present' 가 무엇인지 발견할 권리를 가진다.
<21p>


고양이를 산책시키러 가면서 가장 가벼운 책을 들고 간 것이 재작년에 읽었던 The Present 이다.
이상도 하지. 그때 읽을 때는 모든 것이 쉽게 이해되고 그렇게 살아야지 결심도 했었는데,
책의 초반부 부터 무슨 얘긴지 모르겠다. 내일 죽을 것처럼 하루 하루, 현재를 소중히 여기고 하는일에 즐겨라. 는 것이 아니었나?
그 진리는 모든 사람에게 통용되는 것이 아니었나? 저기 저 old man 이 말한대로라면, 사람마다 'The Present' 로 부터 발견하는 가치도 다를뿐더러, 적용해야하는 가치도 다르다는 것으로 보이는데 말이다...

힘겨운 상황에서 무엇이 잘못되었는가를 생각하기 보다, 어떻게 해야 잘 처리할 수 있을지에 생각을 집중해라. 그러면, 당신이 자신에 대한 절망의 구렁텅이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것을 피할 수 있을 뿐더러, 잘못된 부분에 대해 맞설 수 있는 자신감을 줄 수 있다. <38p,>

뭔가 일이 틀어졌을 때, 가장 먼저 하는 일은 내가 어떤 부분에서 잘못했는가이며, 공동으로 일을 했을 때 누가 그 일에 대한 책임이 있는가에 집중을 한다. 그리곤 자책을 하며 내 자신에 대해 실망을 하거나 다른 사람에게 분노를 하지. 이런식으로는 일을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일때문에 주위 사람을 잃을 수도 있다는 것을 나는 망각한다.


때때로 과거에 발생한 사건으로 인해 현재의 일에 집중하지 못할 때가 있다. 이 때가 바로 "과거"를 살펴서 거기서 무엇인가를 배울때다.
1. 과거에 무슨일이 있어났나?
2. 거기서 어떠한 교훈을 얻었나?
3. 그렇다면 현재에는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
같은 방식으로 일을 처리하면 과거에 저질렀던 똑같은 실수가 반복된다. 하지만 다른 식으로 행동하면 최소한 다른 결과를 얻을 것이다.


소심한 A형 답게 때때로 과거에 발생한 실수가 일본 공포만화 토미에 리플레이처럼 죽여도 죽여도 살아나서 마음을 휘저을 때가 있다. 뼈저리게 느낀 것은 다음엔 정신 똑바로 차리고 최소한 다른 시도는 해 볼 것이다이다.
그러나 그것은 '나' 혼자만의 문제로 단순한 경우이며, 사람과 사람이 얽힌 것은 어떻게 풀어야하는가?
과거에 그러한 것처럼 마음 속으론 불평불평하면서 짐을 다 지을 것인가?


현재 미래에 대한 어떠한 계획도 없다면, 당신은 표류하고 있는것과 마찬가지다.
갑작스레 일어날 수 있는 일을 고려하여 하루 목표, 그 주의 목표, 그 달의 목표를 세워라.
현재라는 것은 지금 나의 목적이 무엇인가를 인지하는 것이고 그것에 적절한 대응을 하는 것이다.
현재의 나의 걱정이나 근심은 고객들의 관심사가 아니다. 현재의 나의 목적이 고객들에게 적절한 대응을 하는 것을 인지하였을 때, 일을 더 효과적으로 할 수 있다

내 인생의 가장 행복한 결심 - 내려놓음

[책 속에서]

우리는 많은 경우, '하나님, 일단 말씀해보세요. 들어보고 좋으면 그대로 하고요. 제 생각이 더 나으면 그때 봐서 절충하지요'라는 자세로 하나님의 뜻을 구합니다. 우리가 인생의 백지 수표에 서명해서 그것을 주님께 넘겨드리기 전까지는 하나님의 뜻을 듣고 분별하는 것을 기대하기 어렵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인생 계획표를 백지인 채로 하나님께 넘겨드리는 것을 주저한다. 대신 하나님께서 우리가 작성한 계획표를 보시고 결재해주시기를 바란다.

사탄은 하나님의 성품에 대해 늘 우리에게 거짓말을 한다.
'인생의 재미보는 것은 이제 끝나는 거야', '네가 하고 싶었던 모든 일로부터 너는 손 털어야 해'
'너, 하나님이 다 내려놓고 아프리카 오지로 선교하러 가라고 하면 어떻게 할 거니?

사람이 자기 힘을 의지하다가 안 되면 자신의 실패지만, 하나님께 의지하다가 실패한다면 하나님의 명예에 먹칠하는 것이라고 선포하고 기도했다.

같은 학교의 왕충은 선교사는 하나님이 우리를 낮추고자 하실 때, 우리가 스스로를 '적당히'가 아니라 '충분히' 낮추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어찌 저리 나를 잘 표현하고 있을까. 하나님께 올인하면 '이렇게 재밌는 만화책도, 영화도, 음악도, 소설도 못읽게 되는거 아냐?'라는 것부터 이제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만 살아야 하는거 아냐?라는 생각들도 든다. 두주인을 섬길 수 없다고 하는데, 나 스스로도 다른사람들에게 말하듯이 항상 한발은 세상에 다른 한발은 하나님께 두고 산다. 언제든지 도망갈 수 있도록. 그런데 무엇이 나에게 하나님께 올인하도록 하자. 나의 삶의 priority 를 하나님께 두자라는 마음을 갖게 했을까? 내 힘으로 모든 것을 하려했는데도 불구 안되는 나자신에 대한 체념일지도, 또는 내가 모든것을 주께 맡길 때 주님이 모든것을 안배하리라는 믿음일것인지도 모른다. 결심하기까지 정말 오래 걸렸다.

적당히 살고 싶은 마음이 많이 든다. 이 책을 읽을 때, 이 저자가 한일하나하나가 너무 거대해 보여 나는 결코 그러한 일들을 못할거야라는 생각도 들고, 명예, 인정받고 싶은 마음, 건강 모든 것들을 내려놓음으로써 더 얻는다고 했는데 그러한 것들이 주는 즐거움을 놓으라는 것이 어려워 보인다. 즐기면서 적당히 하면 안될까? 하는 마음이 든다. 그러나 결국 최종에는 내가 알지 못하는 즐거움 & 깨달음이 있다는 것임을 알기에 한걸음을 내딛여 보려한다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 기업으로 받을 땅에 나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갔으며(히 11:8)

나를 지으신 하나님의 놀라운 손길 - 필립 얀시/폴 브랜드

[아래 본문은 "나를 지으신 하나님의 놀라운 손길"에서]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곡 물에서 올라오실쌔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 하늘로서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 (마태 4: 16~17)

하나님께서는 각 '세포'에게 한 가지 요구, 즉 각 사람은 머리에 충성하라는 요구만 하고 계시다. 오직 머리되신 분에 대한 충성과 그분을 통해 서로에게 충성하는 것만이 중요한 것이다.

소설가 프레데릭 뷔히너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일을 성취하기 위해 성경 시대에 선택하셨던 잡단한 사람들을 다음과 같이 재미있게 묘사했다. "그 누가 하나님께서 정직하고 신뢰할만한 에서(Esau) 대신 비열한 사기꾼 야곱을 택하고, 술을 즐기는 노아를 선택하며, 애굽에서 사람을 쳐죽이고도 미디안에서 벌을 면하려 했던 모세를 사용하고, 대부분 미치광이나 거지와 같았던 선지자들을 들어 쓰시리라고 예상했겠는가?"

우리의 문화는 어린이가 초등학교에서 점수에 의해 실력 평가받으면서 시작되는 등급 체계로 형성되어 있다. 이런 평가에 신체적 외모, 인기도, 운동능력같은 요인을 결합하여 사람들은 자신의 가치를 헤아린다. 이런 사회에서 생활하다 보니 나의 시야는 흐려진다. 나는 병원 수위가 비행사보다 인간적 가치가 덜한 것처럼 생각하기 시작한다. 이런 상황이 전개될 때, 나는 바울이 끝없는 경쟁과 가치 등급을 배경으로 묘사했던 모의 유추로 되돌아가야만 한다. 인간 사회에서는 수위가 쉽게 대체될 수 있기 때문에 신분이 낮다. 따라서 우리는 그에게 봉급을 적게 주고 그를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몸의 분업 체계는 신분에 기분을 두고 있지 않다. 신분과 수행되는 임무는 비례 관계가 아니다. 몸의 수위(관리인)는 없어서는 안될 만큼 요긴한 존재들이다. 이 말이 믿어지지 않는다면 신장 투석을 위해 일주일에 두번씩 병원을 찾아야 하는 사람을 한번 만나 보라.

"만일 너희 회당에 금가락지를 끼고 아름다운 옷을 입은 사람이 들어오고 또 더러운 옷을 입은 가난한 사람이 들어올 때에 너희가 아름다운 옷을 입은 자를 돌아보아 가로되 여기 좋은 자리에 앉으소서 하고 또 가난한 자에게 이르되 너는 거기 섰든지 내 발등상 아래 앉으라 하면 너희끼리 서로 구별하며 악한 생각으로 판단하는 자가 되는 것이 아니냐"(야고보 2: 2-4)



참 놀라운 일이다. 내가 가장 장점이고 강점이라고 생각되는 부분을 하나님은 먼저 깨뜨리신다. "독립적인 것"을 나는 상당히 좋아하며 강점이라고 얘기한다. 그러나 이러한 부분은 공동 작업을 할때 all or nothing이라는 마인드를 가진 나를 보면서 문제라고 인식하기도 한다. 남에게 부탁을 하면 그만큼 내가 무엇인가를 남에게 해줘야한다는 마음의 빚을 갖게 되어, 되도록 이면 나혼자서 일을 처리하려고 한다. 그러나, 나는 나 혼자 잘나서 일을 한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 안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무수히 많은 다른 사람들의 도움 및 협력을 받고 있음을 알게 된다. 혼자 끙끙댈때, 동료의 농담 한마디, 충고 한마디, 보조해 주는 분들의 노고 등 나 혼자서 하는 일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혼자다했다고 자만심에 빠진 경우가 있다.

세상에는 지방세포 처럼 뚱뚱하기만 하고 쓸모없어 보이는 사람도 존재하고, 백혈구처럼 외모는 비록 둔하지만 문제가 발생 시 누구보다도 먼저 다른 사람들을 돕는 사람도 있고, 온몸의 말초까지 장악하면서 명령을 내리는 신경세포처럼 아주 대단하게 보이는 사람 등등 다양한 사람들이 존재한다. 우리의 몸안에서는 powerful한 근육세포가 더이상 힘을 못 쓸때, 쓸모 없어 보이는 지방세포가 자신의 몸을 태워서 근육세포의 일을 대신해주기도 하며, 이러한 세포중 하나만 잘못되어도 몸 자체가 고통 및 혼란에 빠질 수 있다. 이렇듯 그리스도를 구성하는 개개인들이 중요하다 하지만, 그러나 실제로 나는 하나의 세포일뿐이며, 타세포가 무엇을 하든 내게 무슨 큰 상관이 있을까 싶기도하다. 세포 하나하나가 구성되어 전체를 이루는 그리스도는 대체 "내"가 아니지 않느냔 말이다. 물론 타 그리스도인의 생각, 행동양식 등이 내게 영향을 미칠 수 있고 나또한 그러하리란 것은 알지만, 아직 타인을 위해, 전체를 위해, 내가 해야하는 일은 보이질 않는다.


거대한 현대 기술 문명은 한 인간이 일상 생활을 수행해 나가는 과정에서 다른 사람에게 아무것도 요청할 필요가 없도록 만드는 것을 과업으로 설정한 것처럼 보인다. 우리는 갈수록 더 많은 사생활을 추구하고 있다. 그리고 그것을 얻었을 때 점점 더 소외감과 고독을 느낀다.
(필립 슬레이터)

진실되지 않은 상황이 더 편리하고 상대에게 불쾌감을 주지 않을 때가 있다. 그러나 진리를 추구하는 마음은 조끼처럼 입었다가 벗어 던질 수 있는 것이 아니며 근육처럼 수축되었다가 이완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건강한 뼈처럼 견고하고 신뢰할 만한 것이어야 한다. 그런것이 아니라면 쓸모가 없다.

그리스도인의 생활에서 나는 때때로 불확실성을 내포한 선택을 해야만 할 때가 있다. 만일 내가 모든 증거가 들어오고 모든 것이 안정될 때까지 기다린다면, 나는 일체 움직이지 못할 것이다.

오늘날 복음주의자는 어떻게 인식되고 있는가? 종종 이들은 엄격한 규율을 준수하는 사람들로 인식되기도 한다. 신경 정신과 의사들은 복음주의자는 죄책감을 유발하는 자들이라고 통박하면서 그들의 환자의 반 이상이 교회 안에서 혼란에 빠졌다고 선언하고 있다. 왠일인지 우리는 그리스도인의 여러 가지 변형을 만들어 내고 있는것 같다. 우리는 외골격 속으로 물러나, 우리가 세상 다른사람들과 얼마나 다른가를 보여줌으로써 세상에서 우리의 위치를 규정하려는 성향이 있는 것은 아닌가!
나는 율법주의를 무해한 믿음의 변이로 보고 싶은 유혹을 종종 느낀다. 한 교파에서 죄가 되지 않는 활동을 금지하기로 결정한들 그것이 어떻단 말인가? 교인들이 술, 담배를 허물없이하는 외국 교회들이, 그리스도인이 청바지를 입고 껌을 씹는 것이 무슨 큰 죄라도 되는 것처럼 눈쌀을 찌푸리고 쳐다보는 것은 우습지 않은가? 우리의 문화적 버릇이나 멋 같은 것을 무해한 변이라고 보는 것이 어떠한가?


통계적으로 볼 때, 테레사 수녀가 절망의 구덩이에 빠져있는 인간들 중 단지 몇 명의 걸인들을 구조해 준다고 많은 것을 달성할 수 없다는 것을 안다. “기독교는 인생을 통계학적으로 보는 것은 아니다”라고 결론을 맺는다.
기독교는 인생에 대한 통계학적 관념이 아니다. 한시간 노동을 위해 고용된 일꾼이 하루 종일 땀 흘리며 일한 품꾼과 같은 품삯을 받는것을 생각해 보라(마 20:1-16). 한 악랄한 죄인이 회개했다고 하는 나라가 온통 잔치를 베풀고 기뻐하는데 아흔아홉 명의 의로운 시민들은 사실상 무시를 받고 있는 상황을 생각해 보라(눅 14:4-7)
행동을 삼가는 것도 행동을 감행하는 것 못지않게 하나의 행동이 된다

Mere Christianity - C.S. Lewis

If the whole universe has no meaning, we should never have found out that it has no meaning: just as, if there were no light in the universe and therefore no creastures with eyes, we should never know it was dark. Dark would be a word without meaning.


Christian is not a man who never goes wrong, but a man who is enabled to repent and pick himself up and begin over again after each stumble - because the Chirst-life is inside him, repairing him all the time, enabling him to repeat (in some degree) the kind of voluntary death which Christ Himself carried out.


예전에 선물받은 책을 다시 읽고 있다. 열씨미 줄도쳐져 있고 낙서도 되어 있는 것이 분명 열심히 읽었나 본데,
지금은 겨우 겨우 아니 거의 이해를 못하거나 저자에게 '좀더 쉽게 써주지 또는 좀 억지스러운것 같은데 하면서,,' 불만을 표하면서 읽고 있다. 과연 이책을 끝까지 읽을 수 있을까?


Mere christianity 책에서 삶은 우발적으로 그냥 막 생겨난게 아니라 의미가/뜻이 있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 "삶이 무의미한거라면, 우리는 삶이 무의미하다 또는 의미있다고 판단 자체를 하지 못 했을것이다. 예를 들어 세상에 빛이 없고 눈이 없는 생물체들만 산다면, 걔네들은 눈이, 빛이 없기 때문에 어두운지를 모를것이다. "어둠"이란 말 자체가 걔네들한테는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란 얘기를 한다. 우리는 교육이전에 잠재적으로 의미있다/무의미하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삶이 무의미 하다고 판단할 수 있다는 것이다.

조지 오웰의 1984년이란 책에서도 Big brother시대에 사람들을 통제하기 위해 "자유"란 단어 자체를 없애버린 것이 기억난다. 자유란 단어 자체가 없으면 사람들은 '자유'란 단어를 들었을 때 자연스럽게 연상되는 이미지/사상도 생각지 못할 것이다. 그래서 자신의 감시받고 구속된 상태에 대해 원래 그런가 하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되는 것이다. Clever !!

삶이 의미가 있다면 내 삶이 무엇인가 큰 뜻이 있다며 그렇다면 이것이 하나님/예수님과 어떻게 연결이 될 것인가?


God was 'the sort of person who is always snooping around to see if anyone is enjoying himself and then trying to stop it'. The word Morality raises in a good many people's minds: something that interferes, something that stops you having a good time. There are all sorts of things that look all right and seem to you the natural way of treating the machine, bu do not really work.

He quite understands that he must not damage the other ships in the convoy, but he honestly thinks that what he does to his own ship is simply his own business. Does it not make a great difference whether I am, so to speak, the landlord of my own mind and body, or only a tenant, responsible to the real landlord?


많은 사람들에게 도덕이란 즐거운 시간을 방해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재밌게도 누군가 하나님에 대해 표현하기를 "하나님은 내주위에서 서성거리다가 나 자신을 즐기는 꼴을 못보는 분"으로 묘사하기도 한다.

저자는 크리스챤의 세가지 도덕적 행동에 대해 말을 하는데 첫째는 사람들간 관계에 있어서의 공정성, 두번째는 각자 자신의 도덕성, 세번째는 삶의 목적/가치에 있어서의 도덕적 행동이다. 첫번째의 경우는 대개의 사람들이 하지만 두번째 세번째로 갈수록 실질적인 중요성 및 적용성이 떨어짐을 알 수 있다.

'뭐, 내가 무슨짓을 하든 다른 사람한테만 피해 안주면 되는거 아냐?'라고도 생각할 수 있지만, 과연 내부적인 도덕성의 지속적인 쌓음 없이 얼마나, 오래도록 갈 수 있겠느냐 말이다. 마치 오래된 엔진을 가진 배가 다른 배와의 충돌을 피할 수 있겠느냔 말이다. 당장은 보이지 않더라도 하루가 되고 한달이 되고 10년이 되면 그것이 나자신을 표현하는 인격이 되지 않겠느냔 말이다.

크리스챤 가치관에서 삶이란 실질적인 주인은 하나님이며 나의 현재 몸과 마음을 빌려서 살고 있다는 것과 단지 인생 70년 죽으면 끝이라는 생각으로 살아가는 것과 죽음이후에 영원한 삶이 있으며 또한 영원한 지옥이 있음을 알고 살아갈 때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Thou shalt love thy neighbour as thyself'. 'thy neighbour' includes 'thy enemy' and so we come up against this terrible duty of forgiving our enemies. If we really want to learn how to forgive, perhaps we had better start with something easier than the Gestapo.
I must hate a bad man's actions, but not hate the bad man. To wish that he were not bad, to hope that he may, in this world or another, be cured: in fact, to wish his good. That is what is meant in the Bible by loving him: wishing his good, not feeling fond of him nor saying he is nice when he is not.


유대인들이 자신들을 학대한 적을 용서할 수 있을까? 용서는 작은것부터 실천하라고 한다. '나 이외의 우상을 숭배하지 말라'하는 말씀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걸었던 사람이, 자신의 두 아들을 죽인 자도 말씀에 의하면 용서를 해야된다는 얘기지 않겠는가.
네 적을 사랑하라는 말씀을 들을 때 극단적인 경우를 먼저 생각하게 되면서 나는 할 수 없어라는 생각을 먼저 하게 된다. 그러나 내가 살아가면서, 그러한 극단적인 케이스에 처할 일이 얼마나 되겠는가.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는 얘길 하면서 저자는 불가능하다고 생각지 말고 '자신'에 대해 생각해 보라 한다. 내 자신의 비겁함, 탐욕 등을 발견할 때 나는 그러한 나 자신이 싫지만 그것은 내가 나 자신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러한 부분이 싫다는 것이다. 나의 원수를 사랑한다는 것은 그를 좋아하다는 체한다거나, 그가 좋은 사람이라고 말한다거나 그런것이 아니라, 그가 옳은길로 가기를 그의 안녕을 바라는 것이라 한다.


If I am a proud man, as long as there is one man in the whole world more powerful, or richer, or cleverer than I, he is my rival and my enemy. Pride gets no pleasure out of having something, only out of having more of it than the next man. Other vices may sometimes bring people together: you may find good fellowship and jokes and friendliness among drunken people or unchaste people. But pride always means enmity-it is enmity.
Whenever we find that our religious life is making us feel that we are good-above all, that we are better than someone else-I think we may be sure that we are being acted on not by God, but by the devil.
The trouble begins when you pass from thinking, 'I have pleased him; all is well,' to thinking, 'What a fine person I must be to have done it.'


Pride를 real 악이라고 한다. 다른 악, 예를 들어 부도덕한 사람들이나 술주정뱅이들의 경우는 그들 나름대로의 악한 행위를 함으로써 친구를 만들수 있다. 하지만 Pride는 뭔가를 내가 가져서 쾌락을 갖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이 가졌을 때 쾌락을 주기 때문에 'Pride'자체가 항상 '적의'를 의미한다. 다른 사람이 나보다 더 많이 가졌을 경우 그는 나의 라이벌이며 적인 것이다.

나는 순위를 매기고 경쟁하는 사회에서 살아왔다. 외모, 성적, 부, 모든 것에 순위를 매겨놓았다. 여기에서 내 위치가 어느정도인지 다른사람과 비교를 안할래야 안할수 없다. 다른사람보다 지적으로 더 높다고 해서 기뻐하지 아니하며, 낮다고 해서 열등감이 없을 수 있을까? 다른 사람이 악하면 가만히 있는 나는 상대적으로 더 착하게 보일 것이며, 따라서 그 사람의 악함을 방치하는 경우도 있지 않았는가?

God is the thing to which he is praying-the goal he is trying to reach. God is also the thing inside him which is pushing him on-the motive power. God is also the road or bridge along which he is being pushed to that goal. He is being pulled into God, by God, while still remaining himself.
신(하나님)은 인간이 기도하는 대상/목적이다. 사람안에 신이 존재(성령)하는데 이러한 신이 또한 인간이 기도하게끔하는 동기를 유발한다. 또한, 신(예수님)이 목적에 이르도록 가교(다리)역할을 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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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en you are not feeling particularly friendly but know you ought to be, the best thing you can do, very often, is to put on a friendly manner and behave as if you were a nicer person than you actually are. And in a few minutes, as we have all noticed, you will be really feeling friendlier than you were.

There are lots of things which your concience might not call definitely wrong(specially things in your mind) but which you will see at once you cannot go on doing if you are seriously trying to be like Christ.


살다보면 실지로 이것이 나쁜 짓인지 아닌건지 헤깔릴때가 있다. 그러나 내가 진실한 크리스챤이되려고 노력한다면, 그것이 명백히 나쁜짓이기 때문에 그러한 고민할 필요 없이 그것을 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마음속에서 어떠한 것이 나쁜것인지 아닌지 고민한다는 것 자체가 이미 우리는 그것이 나쁜것임을 알지만 우리 욕심에 의해 하고 싶기 때문에 고민을 하는 것이다.


You are quite likely to believe that all this niceness is your own doing: and you may easily not feel the need for any better kind of goodness. Often people who have all these natural kinds of goodness cannot be brought to recognise their need for Christ at all until, one day, the natural goodness lets them down and their self-satisfaction is shattered. In other words, it is hard for those who are 'rich' in this sense to enter the Kingdon.


당신이 크리스챤이 아닌 단지 착한사람이라면, 당신은 더 착한일에 대한 필요성을 느끼지 못할것이다. 종종 착한사람들이 예수그리스도에 대한 필요성을 느끼기 어려운 이유다. 즉, 이미 풍족한 사람은 천국에 들어가기 어려운 것이다.



출장이나 여행시만 가지고 다니며 읽던 책이라 다 읽는데 오랜기간이 걸렸다. 게다가 The purpose driven life의 경우는 쉽게 쉽게 쓰여있는데 이책은 왜이리 어려운지. 하지만, 다 이해치 못하고 읽었는데도 불구하고 걸리는 문구들이 생각을 많이 하게끔 해준다.....

훈련으로 되는 제자 - To know Christ & To make Him known

이 책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뉘어져 있다. 그리스도인의 제자가 되려는 사람의 자질 및 치러야 할 대가 부분과 이를 통해 제자를 모집하고 훈련시키는 부분으로 나뉘어져 있다. 사실, 내가 리더로서 또 다른 제자를 만든다는 부분은 생각지 못한 부분이다. 그러나 내가 제자가 되려는 목적이 다른 사람을 전도하고 훈련시키는 것도 포함하고 있으며, 리더 입장에서 내가 제자로서 가져야 하는 자질도 알 수 있었다.
그리스도의 제자란 우리들 각자 하나하나가 내부적으로는 작은 예수가 되는 것이며 외부적으로는 나로 인해 다른 사람이 주님께로 돌아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본인 스스로 제자의 모범이 되셨다. 사람들이 주님의 삶을 엿보았던 것처럼 오늘날 우리의 삶도 엿보이고 있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기 위해서는 바울이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고전 9:27)‘과 말한 바 같이 자신의 육체를 신뢰하지 않고 끊임없이 자신을 훈련시키는 과정이 필요해 보인다. 심지어 그 대단한 바울도 타인에게 말씀을 전파하면서 오히려 자신이 부적격하지 않을까 하여 자신의 몸을 쳐 복종케 하는 정도이니 나는 말해 무엇하랴는 생각이 든다


***전망이란 어떤 것을 현재 있는 것처럼 보는 것입니다. 여기서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영원한 결과를 바라보며 현재의 결정을 내리라고 권고하십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그의 속에서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그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빌 2:13)’역사하시지 않으면 우리의 수고는 헛된 것일 수밖에 없습니다. [9. 제자를 훈련시키는 방법-확신과 전망] 에서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골 3:23)
[12. 생의 목표 설정]에서

전도의 원리 : (작은 부탁을 통해 기회를 포착) 우리는 본성적으로 누구에게나 은혜를 베풀기를 즐겨하는 성품을 가지고 있습니다. 누구에게 무엇인가를 주는 것을 통해 우리 자신은 스스로가 중요하다는 인식을 갖게 되기 때문입니다.[5. 전도와 제자]에서 ***

그러나, 나는 너무나 많이 나의 본분을 잊고 사는 경우가 많아 보인다. 나의 직업이, 가족이, 친구가 무엇이든 간에 이것 자체가 생의 목표가 될 수 없는데도 이것이 나의 전부인냥 살아가는 경우가 더 많다. 바울은 경제적 필요를 위해 천막 짓는 일을 했다. 그러나 그의 삶의 목표는 로마에서 가장 큰 천막 공장 경영주가 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삶을, 사람들을 낚는 일에 투자하는 것이었다.
우리가 가진 직업에 인생의 대부분을 투자하고 그것 자체가 목표가 되는 경우가 많다. 나는 직업을 통해 생활비와 십일조를 낼 돈을 얻을 수 있고, 또한 명예를 얻을 수 있으며, 친구를 얻을 수도 있다. 지금 나의 삶을 그려 보라면 직업이 중심이고 하나님의 일이 여기에서 뻗쳐나오는 하나의 가지로 묘사될 수 있을 것 같다. 하나님의 일이 중심이고 직업이 하나의 수단으로 해야된다는 방향 전환이 말처럼 쉬워 보이질 않는다.
나의 비전은 직장내 사역이며 개인주의로 뭉친 나같은 사람들에 대한 전도이다. 직장내 사역이라고 하면서 실천으로 보여주는 것이 더 효과적이라고 하면서 나의 행동으로 본을 보일 것이라고 얘기를 했다. 멋진 말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생각해보면, 너무 안일한 발상이 아닌가도 싶다. 그 말은 결국 나 자신을 위해 힘쓰지만 다른 사람을 위해 결국 아무것도 하지 않겠으니 알아서 보고 배우란 얘기인 것이다. ‘자신의 일은 자신이 알아서’란 생각을 가지고 있는 딱 나에게서 나온 생각과 말이다. 무슨 말이든,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든지 그것으로부터 파생되어 나오는 나의 말이든지 그 기저에 깔린 동기 및 목적을 살피는 것이 중요함을 다시 한번 느낀다. 일예로 ‘너는 어떠한 자이기에 죽을 사람을 두려워하며 풀 같이 될 사람의 인자를 두려워하느냐’(이사야 51:12)라는 말은 내가 인생에서 좌절할 때 위로가 되어주지만 나는 이 말을 곧 사라질 인생에 최선을 다할 필요 없다는 것으로 이용하고 있는 나를 보기 때문이다. 나의 비전에 대해 수동적이 아닌 능동적으로 행할 필요성이 보인다.


***증거가 사람이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이라는 사실이었습니다. 비록 사람의 보잘 것 없는 노력이라도 성령께서 준비된 사람에게로 인도하시고 사용하시면 구원의 역사가 일어날 수 있습니다. [8.제자를 훈련시키는 방법 - 기본적인 삶의 형성]에서***

또한, 일을 하다보고 그에 빠지게 되면, 심지어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영광’이 아니라 오로지 ‘나’만 드러나는 경우를 종종 본다. 이번에 영어캠프를 위해 미국에서 오신 목사님이 ‘이 캠프를 통해 아이들이 ‘자신’을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기억 하기를 바란다‘는 말씀을 하셨다. 나에게 있어서 가장 쳐야 하고 지속적으로 십자가를 져야 할 부분이 이 부분이다. 내가 기도하기보다 왜 관련된 여러 가지 책이나 성경을 지식적으로 아는 것에 시간을 더 많이 보내는가에 대해 살펴보면, 지식은 여러모로 활용도가 있기 때문이다. 지식은 내 자신의 호기심을 만족케해주고 또한 알지 못한 다른 이들에게 전달해줌으로써 내 자신의 우월감을 드러내주기도 하는 것이다. 이에 대해 나는 나를 주시하고 있으며 이러한 약점을 나의 은사로 활용하고 싶다는 생각을 해본다. 내 자신이 바로 서지 않았는데 감히 누구를 가르치며 누구에게 복음을 전파하랴라는 생각이 들었었다. 그러나 이것 또한 내 욕심인 듯하다. 완벽할 수 없는데 완벽하려고 애쓰는 나 자신, 나 자신의 약한 부분을 드러내고 싶지 않은 두려움, 또는 공격받거나 비난받을 것에 대한 두려움으로 인해 선뜻 나서지를 못하는 것이다. 그러나, 내가 해야 할 일이 있고 하나님이 하실 일이 있을 것임을 생각해야 한다. 내가 해야 할 일은 어쨌든 주님이 말씀하신대로 순종하는 일이고 나머지는 주님께서 모세를 쓰고자 바로의 마음을 강팍하게 하신 것처럼, 그 사람의 마음을 완화시켜 주님을 영접하거나 가르침을 받을 수 있는 옥토밭으로 만들어주시기를 기대하고 소망하면 되는 것으로 보인다.

***‘면책은 숨은 사랑보다 나으니라. 친구의 통책은 충성에서 말미암은 것이나 원수의 자주 입맞춤은 거짓에서 난 것이니라’(잠 27:5~6)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누 9:23)
[6. 제자 후보생의 징모]에서***


다른 하나 내가 십자가를 져야 할 부분은 사랑이란 이름으로 책망하지 않거나 명백한 잘못앞에서는 자비(또는 gentle instruction)가 없다는 것이다. ‘너나 잘하지’ 또는 ‘나의 티끌만 보이고 너의 눈에 들어 있는 대들보는 안보이냐?’하는 비난 및 관계가 깨어질까 두려워 덮어두는 경우가 있다. 그 사람이 착하지 않은데도 착하다고 말하는 거짓된 입술보다 그 사람의 선을 바라는 마음을 가지고 온유한 가르침에 대한 기술이 나에게는 절실히 필요하다.
농활, 수련회, 주일 말씀, 제자훈련 등을 통해 너무나 좋은 말씀을 넘치도록 받았다. 그러나, 알고는 있지만 이러한 부분을 전혀 실행하지 못하는 내가 답답할 때가 많다. 그러나, 예를 들어 하루에 한 가지 선한일 하기와 같은 구체적 목표를 세우고 점검해가고 회개하고 바라면서, 40년을 기다린 갈렙과 같은 인내가 나에게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데이트 코칭 - 헨리 클라우드

[책 속에서]
참 이상한 일이다. 여성들을 대상으로 강연을 하면 세상에는 신실하고 착한 남자를 찾아보기 힘들다는 하소연을 굉장히 많이 듣는다.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자면 세상은 남자가 없는 수녀원이거나, ~~이다. 인구 이천만 명이 넘는 거대 도시에 사는 여자들은 중서부에나 가야 좋은 남자들을 만날 수 있다고 하고, 반대로 중서부에 사는 여자들은 대도시에서 좋은 남자들을 찾아야 한다고 말한다. 도대체 누구의 말이 맞단 말인가?
남성들을 대상으로 강연을 할 때도 비슷한 이야기를 듣곤 한다. 그들은 매력적이면서 신실한 여자들을 찾아보기 힘들다는 불만을 끊임없이 쏟아낸다. 많은 남자들이 아주 멋진 이상형을 꿈꾸고 있지만 그 이상형에 근접한 여자들과의 교제는 결국 공허하고 허탈한 시간들로 막을 ㄴ리고, 아주 단정하고 신앙심이 깊은 여자들과는 정신적인 우정을 나누고는 있지만 이성으로서의 매력을 느끼지 못하겠다는 것이다. .[5. 일지를 쓰라] 에서

그는 자신의 '짝'을 찾는 일에 너무 몰두한 나머지 교회도 친구들도 모두 멀리하는 우를 범했다. 그의 우상은 바로 결혼이었던 것이다. 그때 당시 서른네살이었던 그는 서두르지 않으면 결혼하기에 너무 늦은 나이가 되지 않을까 걱정스러웠고, 정말 아내가 필요했다. 배우자를 찾는 일에 지나치게 몰두하지 말라. 먼저 당신 자신을 찾고, 신앙생활에 충실하고, 강건해지고, 동역자들과 힘을 합하라. 이 모든 것이 갖추어졌을 때 당신은 어느 누구를 만난다 해도 무방하다.[17. 불신자와의 데이트] 에서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충분한 검증도 없이 한 사람과 깊은 관계를 형성하고, 그 사람과의 관계가 깨어지고 난 다음에도 많은 사람들을 만나보는 과정을 생략한 채 다시 다른 한 삶과 깊은 관계를 가진다는 점이다. [19. 모든 단계마다 전략에 충실하라] 에서

당신이 강하고 분명한 성격의 소유자라면 어려움에 처해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당신에게 매력을 느끼게 될 것이다. 융화는 자신에게 없는 면을 구하려는 노력이다. 당신이 소유하고 있는 것을 스스로 개발하라. 그래야지만 당신이 원하는 당신의 모습을 구하기 위해 쇼핑하러 나갈 필요가 없어진다. [26. 지킬 박사와 하이드가 되지 말라]에서

당신은 외롭지 않기 위해 만남을 원하는가?
외로움을 먼저 치유하라. 그렇지 않으면 의존적인 만남이나 필요에 의한 만남으로 변질될 수 있다.
결혼생활을 통해 당신의 삶이 놀랄만큼 '더 좋아질'것이라고 생각하는가?
어느 누구나 멋진 인생을 살고 있는 사람과 결혼하고 싶을 것이다. 누군가의 꼬여있는 인생을 해결해주기 위해 결혼을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당신의 삶에서 안 좋은 부분이 있다면 서둘러 고쳐라.
[29. 결혼은 꼭 해야 하는가? 데이트는 외로운 사람들을 위한 것이 아니다]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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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속적으로 강조하는 것은 제발 데이트를 결혼과 직접적으로 연관시키지 말라는 것이다. 이러한 경우, 결혼에 too obssessed 해서 결국 데이트를 망치고, 서로를 깊이 알아갈 수 있는 단계에게까지 가지 못한다는 것이다. 결혼보다는 데이트 자체를 즐기게 되면 결국 결혼은 찾아 올 것이라는 얘기를 한다.

사람이 없다고 늘 불평하지만, 그것은 당연한 일일수도 또는 너무 상황에 의존적일수 있다고 한다. 많은 사람을 만날 수 있는 대학을 벗어난 후, 우리의 일상 패턴을 보게 되면 회사, 교회, 또는 취미활동 정도로 늘 같은 사람을 만나게 되는 측면에서 인력풀이 부족하다는 것에 동의하지만, 데이트를 원한다면 좀 더 적극적으로 새로운 사람을 만날 기회를 개척할 필요가 있다는 데에 동감한다. 즉, 예를 들면, 좋아하는 취미 활동을 함께 할 수 있는 모임 등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라는 것이다.

또한, 결혼정보회사에 가입하는 것에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즉, 자기 능력으로 배우자를 찾지 못하면 치명적인 결함이 있는 것으로 생각하기도 한다. 하지만, 언급한 바와 같이 사회에 나오게 되면, 현실적으로 일상에서 보는 사람들은 제한되기 마련이며 이러한 상황에서 배우자감을 구하는 것은 어려운것이 당연하다. 따라서, 이러한 문제가 해결될 수 있도록 도와주려는 결혼정보회사라는 제도에 거부감을 가질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심은 대로 거둔다고 말한 바와 같이, 우리는 시간과 돈을 투자해 왕자를 만나기까지 많은 개구리에게 입을 맞춰야 한다는 것이다.

결혼은 꼭 해야 하는가? 이에 대한 것은 사람마다 다를 것이다. 그러나 결혼이 외로움이나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수단으로 되어서는 안되는 것에는 동의한다. 그러한 것은 결혼이 결코 해결해 줄 수 없는 것이다. 자신을 이해해주고 서포트해주는 동역자가 있다는 점 또는 기댈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점에서는 부럽다는 생각을 했다. 또한, 수억명의 사람들 중에서 하나의 타인과 같은 마음을 가지고 서로를 바라본다는 것은 누구말대로 기적일 수도 있다. 한평생을 같이 할 친구와 같은 신실한 동역자를 바라는 것은 분명하다.

내면 세계의 질서와 영적 성장(ordering your private world) - 고든 맥도날드

[책 속에서 & 의견]
[1. 함몰 웅덩이 증후군]

일상의 작은 행위 하나 하나가 우리의 성품을 만들기도 하고 또는 파괴하기도 하며, 우리가 밀실에서 행한 일로 인해 언젠가 지붕 위에서 통곡하게 되리라는 것을 까마득히 잊고 있었다 .- 작가 오스카 와이들 고백

내면 생활을 정돈하는 시간을 규칙적으로 갖고 계십니까?(='당신의 큐티 생활은 어떻습니까?')

=>큐티를 어떻게 하고 있느냐고 물으면 나는 하루에, 일주일에 하고 있는 바를 정량적 정성적으로 나타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같은 말인 '요즘 내면생활을 어떻게 하고 있느냐'고 물으면 난 먼저 내면생활이 뭐지? 부터 생각케 된다. 오스카 와일드가 고백한 바와 같이 '마음', '조종실'이라고 불릴 수 있는 내면을 내버려두면 자신도 모르는 새에 '폭발'하거나 '함몰 웅덩이'처럼 무너져 내릴 수 있다고 경고한다. 겉으로 보기엔 멀쩡해 보이는 땅이, 내부 지하수가 부족해서 갑작스럽게 무너져 내려 집, 잔디, 차 모든 것을 삼키는 것처럼 말이다.


[제 1부 동기 부여]
drivenness(쫓겨다니는 경향), 이는 최선의 이유가 아닌 다른 이유로 스스로 무언가를 이루겠다고 나서는 사람들 속에서 볼 수 있는 특질이다. 그들은 언제 예수님을 따라 나서겠다거나 그런 관계를 통해 무엇을 얻기 원한다거나 하는 식이다. 만약 그들이 제자로 발탁되었다면, 시간이 흐를수록 첫인상에 비해 그들 나름의 계획이 훨씬 더 많았음이 드러났을 것이다. 즉 우리는 그들이 자기만의 스케줄과 전략, 목표와 목적을 가진 인물들이었음을 발견했을 것이다.

쫓겨다니는 사람은 대인 관계 기술을 닦는데 신경쓰지 않는다. 그들에게는 사람보다 프로그램, 과업, 업무가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들의 시선은 목적과 목표에 맞추어져 있기 때문에, 목표를 달성하는데 쓸모가 없다면 주위 사람들에 거의 신경을 쓰지 않는다. 별로 쓸모없어 보이는 사람이 있다면 과업 완수에 방해되는 장애물이나 경쟁상대로 여기기 일쑤다. 쫓겨다니는 사람 주위에서 일하던 동료나 부하 직원은 지치고 혹사당하여 환멸을 느낀 채 하나둘 떠나 버린다. '그 사람과 함께 일하는 건 정말 죽을 노릇이지만, 그는 일은 틀림없이 끝장내는 성격이긴 해', 즉 쫓겨다니는 사람이 지나간 자리에는 희생자의 행렬이 있기 마련이다.

부름받은 사람은 자신이 청지기임을 알고 있다. 청지기의 일이란 주인을 대신해서 어떤 것을 잘 관리하다가 주인이 오면 넘겨주는 것이다. 우리는 일단 무엇인가를 소유하면 그것을 꼭 쥐고 지켜야만 한다고 여긴다. 우리에게는 그것이 직업이나 재산, 타고난 재능, 영적 은사, 건강 등일수 있다. 쫓겨다니는 사람은 그것들을 잃으면 곧 심각한 위기에 빠지게 된다. 이 모든 것을 전부 빼앗긴다면 어떻게 반응하겠는가?

=>과업의 달성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어 목표 달성에 쓸모가 없다면 주위 사람들에게 신경을 안쓰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일일이 care하다 보면 내 일을 지연하거나 못할 수도 있지 않겠는가. 또한, 천성이 다른 사람에게 관심이 없는 것도 작용을 한다. 삶을 좀 더 simple 하게 하면 쫓기지 않고 내면을 들여다 볼 여유, 주변을 둘러볼 여유가 생길까?
나는 가끔 상상해보곤 한다. '내가 건강을 잃는다면, 이에 의해 직장도 잃게 된다면, 나는 무엇에 의지할 것이며, 내 주위에 남아 있을 사람은 있을 것인가?' 이 질문에 No라고 생각되는 것을 봐서는, 내가 외적인 것에 얼마나 의지하고 있는가와 더불어 청지기적인 삶을 살고 있지 않고 있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제 2부 시간 사용]
무질서한 사람은 자신이 한 일이 보잘것 없다고 느낀다. 일을 끝내 놓긴 했어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 사람들의 칭찬을 그대로 믿기가 어렵다. 최선을 다해서 한 일이 아니라는 것을 내심 알고 있기 때문이다.

방치된 시간은 상대적으로 약한 방향으로 흐르기 때문이다. 일정을 제대로 짜지 않은 상태에서 다른 이들의 부탁을 어떻게 거절할 수 있었겠는가? 예를 들면, 내가 영적 훈련을 소홀히 한다고 해서 하나님은 당장 큰소리로 고함을 치시지는 않는다. 그리고 가족을 위해 시간을 할애하지 않았을때도 아내 게일과 아이들은 잘 이해하고 용서해준다. 그러므로 미리 시간을 할당하지 않으면 다른 일에 밀려나기 쉬운 것이다. 즉, 덜 중요한 다른 것들이 그것들을 한주 한주 밀어내곤 하는 것이다. 그것들이 너무 오래 무시되면 마침내 가족 관계나 휴식, 영적훈련 등이 심각한 지경에 처하여 그 결과를 모면하기에는 너무 늦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는 점이다.

=>연말이 되면 다음해 1년의 계획을, 월말이 되면 다음달의 계획을 짜곤한다. 큰 목표와 함께 정량적인 목표도 같이 제시하면서 구체적으로는 하루하루 할일에 대해서도 계획을 세운다. 이러하지 않으면, 맥도날드 말처럼 시간을 방치하게 되면, 그때 그때 발생되는 사건이나 또는 내 감정/기분에 의해 좌우되어 시간을 보내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이번달은 전체적인 목표중 50% 밖에 달성하지 못했네 다음달은 달성할 수 있는 목표로 보정하거나 더 분발해야겠다는 생각도 월말에 하게 된다. 성인이 되어서는 '선생'이 없다. 모든 것을 스스로 판단하고 결정해야 하며 내가 잘못된 길을 가더라도 내가 인지를 하지 못하거나 알려줄 만한 사람도 없다. 그래서 끊임없이 '진리'에 비추어 자기 점검을 하고 일상을 체크해야하는 것이다.

[제 3부 지혜와 지식]
특히 주위에 영향력 있는 사람이 많아서 그들이 우리 대신 생각해 줄 수 있을 때에는 정신력이 약해지는 것을 방치하기가 쉽다.
엘튼 트루블러드 : "다음 세가지가 잘 계발되지 않는 한 생명력 있는 기독교란 불가능하다. 바로 내적으로는 헌신하는 삶, 외적으로는 섬기는 삶, 지적으로는 합리적인 삶이다."
올리버 웬델 홈즈 : "행동하는 사람은 현재를 소유한다. 그러나 사고하는 사람은 연구를 통해 미래를 얻는다."


=>지적인 성장을 위해 세가지를 권하는데, (1) 경청하는 것, (2) 독서, (3) 공격적인 공부이다. 경청에서 특히나 어려운 것이 비판 부분일 것이다. 네비게이터 창시자인 도슨 트로트맨은 아무리 공정하지 못한 비판처럼 보일지라도 항상 그것을 기도의 밀실로 가지고 가서, "주님, 이 비판속에 감추어져 있는 진실의 알맹이를 보여 주소서"라고 기도했다고 한다. 비난을 받을 때 대부분 내가 하는 행동은 변명을 통한 방어하기에 급급하거나 나역시 상대를 비난하는 모습이다. 한번도 비난하는 자의 입장에서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이 없는 듯하다. '사랑하는 마음에서 혹은 화가 난 고통스러운 상황으로 인해' 나를 비판할 수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내가 비판하는 입장에서 돌아보면, '왜 나는 사랑하고 잘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말을 하는 것이 상대방은 비난으로 받아들이고 결국 논쟁으로 발전하게 되버린 걸까?' 또는 내가 그러한 부분에 대해 불편하고 너로 인해 피해를 당해서 화가 난다. 그것을 왜 나는 잘못, 죄에 대해서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화난 감정까지 같이 폭발적으로 표출하여 말을 하는가?

맥도날드는 독서를 위해 한시간씩 배정한다고 한다. 그리고 항시 읽고 있어야 한다고 한다. 독서는 시간이 있을 때 하는 것이지 시간까지 배정해서 해야하는 필수적인 것으로는 생각지 않았다. 또한, 내 주변 사람이 책을 읽고 있을 때도 여유가 있으니 읽나보다라는 생각을 하고서 중간에 방해하는 일에 전혀 거림낌이 없었다. 그는 항시 책을 읽어야 한다고 한다. '당신은 지금 무슨 책을 읽고 있는가?'


[제 4부 영적인 힘]
우리 대부분은 아무말도 하지 않거나 남의 말을 한마디도 듣지 못하는 분위기에서는 단 한 시간을 보내기도 힘들어한다.

우리는 모두 기도 시간에 무미건조한 순간들을 경험한 적이 있을 것이다. 나는 그것이 반드시 나쁜 징후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우리가 최선의 기도라고 느끼는 것이 사실은 최악의 기도가 아닐지 가끔 의심해 본다. 즉, 우리가 느낀 즐거움이 실은 춤을 추거나 시를 낭송한 다음 느끼는 일종의 성취감에 불과한 것은 아닐까 생각해 본다. 하나님은 우리와 더불어 대화하기를 원하시는데 우리는 그분에게 일방적으로 말하기를 고집하여, 우리 기도가 때로 잘못되는 것은 아닐까? - CS 루이스

우리의 내면세계는 날마다 이 시대의 메시지로 온통 폭격을 당하고 있다. 그 메시지들은 영적인 성격을 가진 것이라면 무엇이든 시간 낭비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우리는 아주 어릴 때부터 오직 행동으로만 무언가를 성취할 수 있다고 은연중에 배워왔다. 그런데 기도는 일종의 행동 부재로 보인다. 내면이 무질서한 사람에게는 그것으로는 아무것도 성취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이기 마련이다.


[제 5부 회복]
우리 사회가 무척 여가 지향적인 사회라는 사실에 비추어 볼 때 우리 세대의 피로는 참 이상한 현상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과거 어느 때보다 더 많은 여가 시간을 갖고 있는것 같다. 주5일제 근무제는 역사상 비교적 최근의 고안물이다. 그런데도 왜 우리는 극도의 피로에 찌들어 살고 있는 것일까? 이 피로감은 실재하는 것인가 아니면 상상의 산물인가?

하나님은 쉬실 때 자신이 하신 일을 바라보고 그 완성된 모습을 즐기며 그 의미를 묵상하셨다. 이러한 쉼은 무엇보다도 먼저 되돌아보는 시간, 곧 회로를 닫는 시간인 것이다.

우리 교회의 한 형제가 '저는 안식일이 일주일에 하루만 있어서 기쁩니다. 매주 오늘 같은 안식일이 있었다가는 완전히 탈진하고 말겁니다.'라고 말했다. 이 유머는 사실 일요일을 쉴 수 없는 날로, 어떤 이들에게는 일주일 중 가장 긴장된 날로 바꾸어 버린 그리스도인 지도자들과 교회들에 대한 심각한 고발이다.

=>쉼이란 무엇일까 생각해본다. 왜 나는 종일 쉬었는데도 불구하고 다음날 피로감과 허무함을 느끼는 것일까. 지금까지 내가 쉴 때는 무엇을 했는가. 보통은 미드와 소설과 만화로 하루를 보내는 경우가 많다. 잠깐의 즐거움(쾌락)은 준다. 그러나 우리의 위를 솜사탕으로 채울때 잠깐의 달콤함만을 느끼고 사라지듯이 그것은 우리의 위를 채우고 우리의 몸과 마음에 영양분을 주는 '밥'은 아닌것이다. 다른 사람의 '안식'을 위해 목사가 직업인 사람은 '안식일'이 '안식일'이 아닐수 있다. 유대인들은, 안식일날 먹을 음식을 그 전날 함으로써, 주부는 안식일을 정말 쉼으로써 보낼 수 있게 된다.

나는 안식일을 어떻게 보내고 있는가? 또는 쉬는날을 어떻게 보내고 있는가? 주일은 종일 분주함으로 보내게 된다. 예배를 드리면서 한주간을 되돌아보고 묵상하는 시간, 일상생활에서 정기적으로 멈춰서서 우리 삶의 근거가 되는 진리와 헌신을 되새기는 시간이 되어야 하는데 빡빡하게 짜여진 스케쥴과 함께 이곳저곳을 이동하면서, 그리고 일주일만에 만난 사람들과 교제를 하면서 다시 세상적인 일로 내 머리와 마음을 가득 채워오는 것이다. 이리하고 집에오게되면, 사실 지친 마음이 더하다. 지금 현재의 시스템으로는 그럴 수 밖에 없다면 나도 맥도날드처럼 나만의 안식일을 정해서 쉬고 재충전해야하는 날이 필요하다. 그것이 나에게는 현재는 토요일일 수 있으며, 잠깐의 즐거움을 통한 육적/영적 피로로 결론이 나기전에 산책과 독서, 그리고 홀로 광야의 시간을 가질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 즉, 나는 지금 '진정한 안식, 쉼'의 훈련이 필요하다

내 마음 그리스도의 집 - Robert Munger

[책 속에서]
"그 분을 기쁘게 하도록 하도록 힘쓸 때 바로 그 양식이 너를 만족시킬 것이다. 우선 약간이라도 맛보지 그래?" 다른 어떤 음식도 결국에는 여전히 허기가 남을 뿐입니다.

"너는 이제껏 경건의 시간이나 성경연구나 기도 시간을 네 자신의 영적 성장에 필요한 수단으로만 생각해 왔다. 그건 사실이다. 하지만 이 시간이 나에게도 의미가 있다는 것을 잊고 있구나."

"그것들이 죽은 것이고 썩은 것임을 알았지만 그래도 나는 그것들을 사랑했고 그것들이 필요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벽장을 여셔야 합니다. 주님이 그것을 깨끗하게 청소해 주십시오. 제게는 그럴 만한 힘이 없습니다."
"네게 그럴 능력이 없다는 것을 안다. 열쇠만 내게 다오. 그러면 내가 하마."

"어느 한 방을 청소하면 다른 방에 다시 먼지가 쌓이고 이층을 청소하기 시작하면 일층이 벌써 먼지투성이가 되었어. 나는 정결한 마음과 순종의 삶을 계속 유지하느라고 너무 피곤하고 지쳤어. 나는 그것을 감당할 수 없어. 그러나 이제부터는 제가 하인이 되겠습니다. 당신이 저와 이 집의 주인이 되어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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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한일 100번하거나 기도 100번, 이와 같이 나의 노력 또는 행위의 산물로 인해 구원을 받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한적이 있다. 너무 애매모호했기 때문이다. 물론 그 바탕에는 내 비록 구원받기 위해 행위는 하지만 내 마음이 콩밭에 있든 어디에 있든 상관치 말라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순종을 내포하지 않음을 안다. 또한, 내 힘으로 할 수 없는 것들이 있다. 하고 싶지 않음에도 불구, 하게되고 하고 나서는 후회를 하지만, 할 당시엔 나에게 기쁨을 주고 육체적 편함을 주기 때문에 그것들이 썩은 것임을 알지만 버리지 못하고 사랑하는 것들이 있다. 책에서 제시한 바와 같이 이럴 경우, 주님을 나 자신의 주인으로 인정하고 주님께 모든 것을 오픈하고 드리면, 즉 내가 쥐고 있는 것을 놓으면 더 풍성한 것을 누릴 수 있다고 한다.
교회 출석 잘하고, GBS 적극 참여하고, QT, 기도, 말씀, 제자훈련 등을 열심히 해서 외면상으로는 하나님, 예수님이 내 삶에서 우선순위고 주인인 듯이 보이지만, 그 중심에는 하나님이 없고 내가 있음을 안다. 주님께 열쇠를 드린다고 하면서 행위, 외부의 열쇠는 드리지만 내부, 마음의 열쇠는 여전히 내가 꽉 쥐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주님이 내 삶의 주인이란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1) 주님이 주인임을 인정하는 것이다. (2) 주인으로 인정함의 표현으로 순종이 있다. 나는 관리자일뿐이며 따라서 주인의 말을 따라야 한다. 여기서 주인의 말이란 말씀을 통해 그리고 기도를 통한 분별로 보인다. 정의의 하나님을 믿음으로써 당장의 시험 및 고난에도 순종해야 한다.(정의의 하나님, 이 부분은 사실 잘 모르겠다. 말씀에서는 정의로우신 하나님이라고 하기 때문에 믿는다. 그러나, 신은 완벽이며 전지전능하므로, 인간적인 생각으로는 선과 악 양면이 있어야 완벽이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하나님이 천지를 만드시고 악, 죄가 이것의 외부에서 틈을 타 우리에게 왔다고 하는데 이것에 대해서도 어떻게 전지전능한 하나님의 영향력 밖에서 무엇인가 강력한 것(악)이 나올 수 있는가 하는 의문도 든다.) (3) 여기서 더 나아가 주인을 기쁘게 하는 일도 있을 것이다.

나는 왜 주님을 삶의 주인으로 모시는데 어려움을 느낄까? 원인이 무얼까 생각해 본다. (1) 주권자로 인정을 하지 않는 단계에 있다. 대통령이 나와 상관없는 사람처럼, 하나님은 너무나 멀리 떨어져 있는 것처럼 느껴져서 가까이 있는 상사, 친구, 선생님 등이 나의 교제자가 되는 것이다. 비록 내가 지금 하나님께 시간, 재물, 노력은 드리지만 - 물론 이러한 것들도 내가 여유가 있는 한에서 - 교제에 중점을 두는 것이 아니라 '연구'에 더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정말 그러한가 아닌가 하나씩 적용해보면서 연구하고 있는 것이다. (2) 불확실성이다. 예를들면, 기도하기 위해 시간을 만들고, 기도하고, 기다리기 보다는 그 시간에 내가 내 나름의 방법을 강구하고 실행하는 것이 바로바로 결과를 볼 수 있고 확실하다. 현대 사회는 매우 스피드하다. 몇초 단위로 티켓을 못 끊을 수 있고, 몇초를 못 기다려 엘리베이터 닫힘 버튼을 꾹꾹 누르기도 한다. 사람들은 시간이 없다고 아우성이고 나또한 피곤하다고, 바빠서 못했다는 말을 버릇처럼 달고 다닌다. 이러한 환경에서 어떻게 가만 앉아 주님과 시간을 보내겠는가? 또한, 기도의 응답 또는 삶에서 살아있는 하나님에 대해 애매함을 느낀다. 귀에 걸면 귀걸이고 코에 걸면 코걸이처럼, 특정 현상에 대해 어떤이는 하나님께 감사하고 다른이는 좀 더 논리적이고 그럴듯해 보이는 과학적/또는 사회학적 현상으로 해석을 하는 것이다. 결국, 그동안의 살아온 방식, 배운 것, 경험을 기반으로 모든 결정과 행위와 사고의 중심에 내가 있게 된다. 그러고 보면, 나는 현시대의 대세인 실증주의와 경험주의에 많은 영향을 받아 살아왔다는 생각을 해본다. 하지만, 우리가 살아가는데 필요한 것들과 이러한 사상들은 대부분 맞아떨어지는 면이 많이 있지 않은가 싶다.
또다른 예를 들어, 내가 한달 동안(또는 일년) 영어 공부를 열심히 하면, 노력의 성과가 토잌 점수로 나타날 수 있다. 그러나 내가 특정일에 대해 기도를 통해 간구하면 이에 대해 여러가지 결론들이 나올 수 있다. 전혀 응답이 없는 것에 대해 답할 수 있는 말로 '좀 더 진실로 믿음으로써 기도해봐', '네가 아직 준비되지 않아서 그래', '하나님은 주셨는데 네가 모른거야' 등의 말만 해주지 않은가. 도대체 진심의 척도란 무엇이란 말인가? 한 점 의심없는 완벽한 순종, 믿음이란 말인가? 그것이 가능하단 말인가? 이러한 것들이 진실의 단면일 수 도 있고, 또한 진실일 수도 있으며, 내 취향에 맞지 않는 답변으로 인한 거부일 수 도 있다.

그러나, 이 모든 의문들을 제하고 내게 필요한 것이 사실 뭔지 안다. '우선 약간이라도 맛보지 그래?'라고 말씀한바와 같이 이러한 모든 사항들을 뒤로 물리고 사실 나는 조금이라도 맛을 보는 것이 필요하고 지금 그렇게 하고 있는 중이다. 또한, 아무리 그럴듯한 말로 포장해도 진실이 무엇인가를 분별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시리라고 그리고 주님이 내 삶에서 역사하심을 내가 끼워맞추는 것이 아니라 저절로 알고 확신할 수 있는 그날을 소망하고 있다.

늘 급한 일로 쫓기는 삶(Tyranny of the Urgent) - 찰스 험멜

[책 속에서]

예수님은 돌아가시기 전날 밤에 아주 놀라운 말씀을 하셨다. '나는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맡기신 일을 완성하여 땅에서 아버지를 영광스럽게 하였사옵니다.'(요 17:4) 수많은 사람들은 여전히 예수님을 필요로 하고 있다. 근육이 마비 상태로 움츠러들어 있다가 회복된 사람이 열이라면, 그 열배나 되는 사람들은 여전히 무능력자로 남아 있었다. 그리고 눈멀고 병으로 상하고 불구가 된 자들이 온 천지에 널려 있었다. 필요한 일거리들이 수다히 미완성으로 남아 있고, 사람들의 긴박한 요구 사항들도 다 채워지지 않았던 그 마지막 밤에 주님께서는 평안을 누릴 수 있었다.

'예수께서는 마르다와 그의 자매와 나사로를 사랑하셨습니다. 그런데 나사로가 앓는다는 말을 들으시고도 계시던 곳에 이틀이나 더 유하셨습니다.'(요 11:5~6)

예수님은 하나님이 작성한 어떤 청사진이나 일정표를 갖고 계신 것은 아니었다. 주님은 매일매일 기도하는 생활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신 것이다.

'많이 주어진 사람에게서는 많은 것을 요구한다.'(눅 12:48)

시간에 대해서는 그만큼 신중하지 않다. 예상치 않았던 기회나 요구에 충동적으로 많은 시간을 소모한다.

새로운 일정표를 작성할 때 예상치 못한 일을 대비하여 약간의 시간은 비워두라.

별도로 한주에 한시간씩 떼어놓으라.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할 것인지를 계획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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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거리엔 아직도 병자와 소경 천지 인데, 사람들의 긴박한 요구 사항들이 다 채워지지 않은 상태인 그 마지막 밤에 예수님은 어떻게 평안을 누릴 수 있었을까? 나사로가 죽어간다는 말을 들으시고도 어떻게 여전히 머물면서 그의 사역을 할 수 있었을까? 시간이 하루밖에 없으니 더 더 많은 사람들을 고쳐주고 구원해줘야겠다는 생각보다, 예수님은 그의 일, 즉 맡긴 일을 완성하기 위해 전력을 쏟으시는 일에 집중한 것이다.
우리는 돈에 대해서는 낭비하지 않도록 계획도 세우고 충동구매에 따른 후회도 하지만, 상대적으로 시간을 헛되이 보내는 것에 대해서는 인지하지도 못하고 낭비라고 생각지도 않은 경우가 많은 듯하다. 또한, 늘 바쁘다는 말을 입에 달며, 마치 바쁘지 않다고 하는 사람은 중요하지 않은 일을 하고 있거나 중요하지 않은 사람처럼 느끼기도 한다. 무척 바빠보이고 시간에 쫓겨다니는 사람이 프로페셔널하고 쿨하게 보이는 것이다.

(1) 중요한 것과 긴급한 일을 구분하는 능력
이러한 가운데 내가 우선순위를 하나님께 두지 않는다면, 나는 정말로 목전에 앞둔, 그리고 언제나 긴급하다고 하는 현실과 일에 의해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게 된다. 누구말대로 오늘 내가 말씀 한번 건너뛴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나무라지는 않는다는 것이다.(그러면 또 어떠랴. 회개하면 되지 않은가. 라는 얄팍한 생각도 든다)


(2) 중요한 일에 시간 배정 & 여유시간 만들기
내가 즐겨보는 미드 '하우스'에서, 닥터 하우스는 아프리카에서 의료사역을 하는 한 의사에 대해 이런 식으로 조롱한다. '당신이 6시간 자는 동안, 결핵으로 1440명이 죽는군, 잠을 안 잘 수 없겠지만, 봐라, 당신이 10분만 잠을 안자고 버티면 40명의 생명을 구할 수 있지 않냐?'
나사로, 즉 사람의 생명을 구하는 것 만큼 중요한 것은 없어 보이는데, 예수님은 그 일 대신 사역에 초점을 두셨다. 언뜻 보기엔 이해가 가지 않으나 예수님은 자신에게 남은 시간, 지금 이 시점에 하지 않으면 안 될 일, 그리고 나중에라도 할 수 있는 일 등 이리저리 재보시고 결정을 하셨으리라 생각한다.
나의 경우엔 다행히 생명 vs. 사명이 아니라 훨훨 경중한 문제인 영적생활(기도, 말씀 등) vs. 맡겨진 일로 시험을 당하는 경우가 많다. 또한 다행히도 나의 시간중 예전에 미드나 소설을 보며 보냈던 시간을 영적생활로 대체하기 때문에 현재는 그럭저럭 해나가는 편이다. 즉 현재는 나쁜 버릇이라고 생각했던 부분을 버리는 것이기 때문에 나도 만족하지만, 점차 이를테면 나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과의 만남/최선을 다해야 하는 일 vs. 영적생활 등 두가지 좋은 것들에서 선택해야 하는 시점이 도래한 것이다. 그러한 경우, 내일 스케쥴을 오늘 보면서 어디 시간이 나올 구멍이 없나를 살펴보면서 시간을 찾아서 두가지 다를 하거나, 두가지 다를 70%만 도달하자는 마음으로 하거나, 또는 한가지를 포기해야하는 경우가 생기는 것이다. 이러한 경우, 사실, 대부분 나의 자의적 판단에 의해 결정하지만, 예수님처럼 기도하는 생활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도록 해야 한다고 한다.


(3) 안식 및 여유시간을 가지면서 지난일 돌아보고 앞으로의 계획세우기
너무 계획을 타이트하게 짜면, 빡빡하게 시간에 쫓기면서 생각없이 일만하게된다. 잠깐 쉬면서 내가 한 일을 되돌아 보고,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서도 생각할 수 있는 여유 시간도 같이 마련할 필요가 있다. 즉, 나의 경우엔, 중요한 일을 먼저 배정하고 어떠한 일이 일어날 지 모르는 일에 대한 버퍼 시간도 같이 마련할 필요를 느낀다.
결론적으로, 비록 주중에는 사람들과 일로 인해 분주할 지라도 부디 나만의 안식일을 가져서, 일주일의 분주함을 돌아볼 시간, 그리고 주님과 깊이 교제할 시간 마련이 필요함을 느낀다. 안식이란 것이 하루종일 방안에서 뒹굴면서 먹고, 좋아하는 소설이나 미드 같은 세상적인 것으로 내 속을 꽉꽉 채우는 것이 아니라 맥도날드처럼 산책과 사색, 하나님과의 교제로 채울 필요를 느낀다. 또한, 모든 일에는 선택함으로써 희생이 동반될 수 있음을 알아야 할 것이다.

[그 밖의 의견]
이 소책자를 읽으면서 느낀 다른 하나는, 예수님은 무엇하나도 그냥 말하고 행동하는 것이 아니다라는 것이다. 즉, 그가 말한 모든 것이 진리라고 생각하면, 그의 말 행동 모든 것들은 하나 하나 깊은 의미가 있음을 알게된다는 것이다. 즉, 단지 그를 신으로만 생각지 말고 인간으로서의 본받을 점에 대해서도 생각해볼 수 있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바다의 풍랑에 의해 제자들은 어찌할 바를 몰라 발을 동동거렸지만, 예수님은 평안히 깊이 잠드셨다고 한다. 여기서 보통 제시하고 있는 주제는 '어찌하여 무서워하느냐?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였다. 다른 한편으로 생각해보면 알고 계셨기 때문에 평안히 잠드실 수도 있지만 그의 하루가 우리가 그러하듯이 새벽부터 저녁까지 고단하게 돌아다니셨기 때문에 푹 주무셨을 것이라는 생각도 해볼 수 있는 것이다. 힘들면 발이 부르트고, 목이 쉬는 우리와 똑같은 인간의 육체를 가지고 그는 새벽부터 밤까지 부지런히 자신의 일을 최선을 다했다는 것이다. 힘든 하루를 마치고 아기처럼 쌔근쌔근 주무셨을 아주 인간적인 예수님의 모습이 그려진다.

21일 기도습관 만들기 - 하정완

[책 속에서]

인간이 죄를 범한후, 결국 실패를 경험하였고, 그 같은 경험을 하면서 아무생각없이 살고 싶어하고 의도적으로 포기하고 귀찮아 하는 기본적인 성품이 만들어진 것입니다.

기도하지만 기도하지 않는다 : 표면적으로는 괜찮아 보입니다. 그러나 생각속의 기도로 머물거나 절박감이 떨어진 형식의 기도를 한다는 점입니다. 소위 가벼운 제2상한의 기도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분명 마음에는 중요하다고 느끼지만 전혀 중요하지 않은 삶의 태도를 가진 기도 말입니다.

기도의 부담감 : 주님은 우리의 기도를 통하여 일하시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즉, 우리가 기도하지 않으면 그 일은 이루어지지 않을 수도 있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기도하지 않으면 지금 죽어가고 있는 아무개가 죽는다'라고 생각해 보십시오.

쉬지 못하게 하라 : 단 한 사람의 기도로도 세상이 구원받을 가능성이 있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가장 큰 이유는 우리가 멸망되지 않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단 한 사람이라도 하나님을 헤아리는 진정한 사람이 존재하기만 한다면 그분은 계획을 계속 진행시키고 싶으신 것입니다. 아주 희미한 가능성만 가지고서라도 주님은 일하고 싶으신 것입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만족스럽지 않을지라도, 쉽게 말해 당장 그일이 이루어지지 않을지라도 그것은 씨앗을 말하기 때문이고 희망을 말하기 때문입니다. 기도는 하지만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지도 못한 채 오직 자신을 위해서만 기도하는 매우 이기적으로 자신 안에 갇혀 있는 사람만이 고작 존재하는 시대가 종말입니다. 하나님의 계획은 안중에도 없고 오직 자신만이 존재하는 시대 말입니다.
그렇다면 기도하지 않을 때에는 어떤 일이 벌어지는 것입니까? 하나님이 계획을 세우셨지만 이스라엘이 기도하지 않으면 결코 실행하지 않으십니다.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래도 이스라엘 족속이 이와 같이 자기들에게 이루어 주기를 내게 구하여야 할지라.' 겔 36:37

사막경험 : 내가 하나님에게로 더욱 가까이 가는 것을 타락한 영성을 가진 내가 싫어하기 때문입니다. 적당히 믿고 가는 것은 받아들이지만 완전히 100% 하나님의 소유가 되는 것을 나 자신이 완전히 동의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아직도 내 안에 있는 죄의 권세가 자신의 통치를 빼앗기고 싶지않은 것입니다. 가만히 있어도 흘러나오는 것이 죄입니다.

바보의 벽 : 임신과 출산에 대한 비디오를 보여줬는데 남학생들은 별로 새로운 것이 없었다는 반응을 보였습니다. 실제로 그들이 정말로 다 알기 때문이 아니라 자신과 관계가 적은 정보였기 때문에 자신이 알고 싶어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스스로 정보를 차단하고 자신이 알고 싶어하는 것만을 바라보려 하기에 벌어진 현상이었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의 관심 밖에 있는 것이나 자신에게 불리한 경우에는 아예 하나님의 적극적인 음성조차도 들으려고 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느낌 기도의 위험성 : 우리는 기도보다 느낌이라는 강한적을 만나게 됩니다. 우리의 느낌과 상관없이 기도는 응답된다는 사실입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우리는 이미 응답된 기도를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 기도란 우리가 구하기 때문에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이미 우리를 위해 준비해 놓으신 것을 구하는 것이고 이제는 그것을 누리고 사용하는 것만 남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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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기도의 습관화
나는 기도를 가장 어려워한다. 따라서 나에게는 먼저 기도를 위한 시간 할당과 장소 세팅을 강제적으로 할 필요성이 있다. 규칙적인 기도를 위해서는 새벽녘이 적절한 타이밍이다. 그러나 하루의 시작을 역시 QT로 시작하고 싶어하는 마음과 학원수강으로 인해 새벽은 기도할 수 있는 시간이 내게 그리 많지 않다. 그래서 나는 주로 자기 전 1시간 30분 전을 기도시간으로 세팅하는데, 저녁 시간의 약속과 하루생활의 정리, 미흡한 일에 대한 처리 등으로 인해 종종 계획된 시간보다 늦어지거나 규칙적으로 되어 지기 어려운 부분이 있다. 때로는 이러한 일정으로 인해 잠을 잘 수 있는 시간이 줄어들면서 다음날의 일정에도 영향을 미치게 되는 단점이 있다. 어쨌든 지금은 이러한 trial & error를 반복해가면서 기도와 QT의 가장 적절한 시간을 찾아가는 중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중요한 점은 비록 어떠한 일이 발생하더라도 기도 시간 또는 경건의 시간 총량제를 지켜나가는 것이다. 즉, 기도시간을 30분이라고 했으면, 내가 비록 육체적으로 힘들고 정신적으로 공황상태에 빠져 자기자신의 연민에 빠져 기도하고 싶지 않을 때라도, 기도 5분 + 찬양 10분 + 말씀 15분 =30분 등 이런식으로 경건의 시간, 즉 총량을 강제적으로 채워넣어야겠다는 결심을 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기도는 극제1상한에 해당되는 것으로 나도 무슨 일이 있더라도 엘리야처럼 내 하루하루의 삶에서 가장 최우선순위에 놓아야겠다는 결심을 해본다.

(2) 기도의 내용 & 하나님의 뜻 & 듣기
나의 삶의 태도는 요로 다케시가 말한바대로 '바보의 벽'에 갇혀 있던 경우가 많음을 본다. 모든 것은 '나' 또는 '내 일' 중심이라서 그 밖에는 관심이 없고 들으려고도 하지 않는 경우가 많고 그것이 시간낭비를 줄이고, 내가 필요한 정보만 얻을 수 있기 때문에 오히려 효율적이라고 생각하기도 하였다. 일예로 쇼핑을 가더라도 내가 필요한 것 그것만 보고, 그것만 사는 것이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내가 원하는 목적에 빠르고 효율적으로 도달할 수는 있지만, 주변을 관심을 가지고 돌아볼 때, 비록 당시에는 쓸모없어 보일지라도 얻을 수 있는 것을 놓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여유 및 관심이 향후에 우연찮게 도움을 주거나 또는 인간관계에 있어서는 윤활유 같은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내 나름으로는 효율성이라고 생각하는 이러한 태도가 기도에도 고스란히 반영된다. 내가 원하는 것만 줄줄이 외우듯이 말하고, 생각하고, 간구하면서 내가 할일은 끝냈다는 생각을 하며, 하나님의 뜻이 무엇일지 또는 하나님이 말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일지는 전혀 관심을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이다. '하나님 뜻 안에서 무엇이든지 원하는대로 구하면 다 이루리라'하셨다. 하나님의 나에 대한 뜻은 무엇일까. 이것은 내가 기도를 하고 그 기도에 대한 응답에서 뜻의 유무를 알 수 있다고 해석해도 될까? 이루어지지 않으면 그것은 나에 대해 가지고 계신 하나님의 뜻이 아니기 때문이라고 해석해도 될까.


(3) 응답에 대한 확신
반드시 응답을 주신다고 하셨다. 기도하지 않으면 선물은 그대로 포장된 채 있을 것이다라고 하신다. 이미 구할 것을 예비해 두셨다고 하시지만 그래도 이루어지기를 구하라고 하셨다. 이전에 응답에 대해 불확실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하나님의 상기 말씀으로 인해 이제는 반드시 응답해 주시리란 것을 믿는 믿음으로 기도를 한다. 내가 기도를 할 때 이미 하나님은 기도에 대한 답을 미리 준비해 두셨다. 여기서 잠깐, ‘주리라는 답을 준비해두셨더라면 내가 이 시점에서 노력을 하지 않지만 기도를 열심히 하면 나에게 주어지는가’ 하는 의문이 든다. 그것은 아닐 것이다. 내가 기도하는 그 시점에 그리고 내가 기도를 통한 행위를 함으로써 미래의 답은 즉각즉각 바뀔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를테면 대학원에 대해 하나님은 예스라는 답을 준비해두셨다. 그러나 내가 기도를 했으니 되었겠지 하면서 원서를 대충해서 내면, 아무리 하나님이 주리라고 하셨지만 어떻게 줄 수 있겠는가? 그렇다면 그것은 순전히 내 노력으로만 예스라는 결과를 얻게 된 것 아니냐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시점에서 내가 봐야하는 것은 결과가 아니라 과정에 있다. 내가 예스라는 응답을 받을 수 있도록, 준비하는 과정 중에 인간적인 욕심, 편함을 이기고 순전히 대학원에 준비할 수 있도록 인도해 주신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응답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4) 중보 기도 & 기도의 동역자
최근에 노아의 순종에 따른 그의 가족들까지로의 구원에 대한 QT를 하였다. 물론, 노아 입장 또는 그 가족입장에서는 감사한 일이지만, 타인의 입장에서는 노아는 의인이라 이해하지만 그로 인하여, 그들 눈에는 그들과 별반 다를 것 없는, 똑같이 죄를 저지르고 사는 자식들까지 구원을 받는다는 것은 불공평하게 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이것은 결국 비기독교인들이 '예수만 믿으면 아무리 나쁜 짓 해도 천당가고 예수 안 믿으면 아무리 착한사람이라도 지옥가냐'라고 논쟁을 일으키는 것과 같은 얘기다. 이에 대한 나의 해석은 다음과 같았다. '어차피 하나님 눈에는 이 인간이나 저 인간이나 죄는 오십보 백보이다. 그러나 A라는 사람에게는 그를 위해 중보해주는, 하나님 눈에 어여쁜 의인이 함께 한다. 의인 때문에/예수님 때문에 A를 봐주는 것이다.‘ 이것은 '타인'의 입장에서 봤을 때 불공평하게 보이는 것에 대한 나름대로의 해석이다. 이제는 내가 노아 같은 입장이라면 어떠할까? 라고 생각해보았다. 나로 인해, 단지 나 한사람의 기도로 인해, 내 가족을 포함한, 이 땅에서 고통받고 있는 사람들이 긍휼을 얻는다면, 나의 기도로 인해 하나님께서 계획을 바꾸신다면 얼마나 멋진 일이며 감격스러운 일이며 영광스러운 일일까를 생각해보면, 나는 당연히 내 가족을 위해 내 땅을 위해 응답하실, 행하실 그분을 믿고 기도해야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기도를 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함을 느끼며, 그의 나에 대한 뜻이 무엇일까, 그리고 이 땅에 대한 뜻이 무엇일까를 생각해보고 찾아가야 한다.

결혼 건축가 - 로렌스 크랩

[책 내용과 의견]


[1. 결혼은 연합이다]
성경은 정서적 필요를 채우는 방법을 찾는 참고서 신세가 되었습니다. [서문]

그리스도가 나를 안전하게 하셨고 중요하게 하셨습니다. 내가 느끼든 느끼지 못하든 그것은 사실입니다. 남편은 자신의 필요가 이미 채워졌다는 사실을 더 이상 믿지 않습니다. 아내를 제대로 대할 수 있으려면 아내 쪽에서 먼저 남편의 안전감과 중요감을 채워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아내가 먼저 채워 주기를 기다립니다. 그 후에야 아내에게 자신을 내주겠다는 것입니다. 아내가 그를 채워 주지 못하면 아예 뒤로 물러나거나 혹 아내를 공격할지도 모릅니다.

[2. 영적연합]




=>내가 낭떠러지에서 몸을 던지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을 믿지 못해서인가? 너무 두렵기 때문일까? 그러나, 내가 떨어지려고 결심하고 한 발 내딛을 때만 하나님이 존재하심을, 하나님이 나를 잡아주심을 알 수 있는 것이다라고 한다. 나의 속마음을 내비쳤을 때, 사람에게 거부당할 두려움, 비난에 대한 낮은 자존감, 등 상처받을 수 있기 때문에, 그것이 너무나 어렵기 때문에, 늘 생각만 하고 한 발 앞으로 가지 못하는 것이다. 차라리 객체를 바라보듯 한 발 물러서 있는 것이 안전하고, 거짓된 평안일지라도 편안하지 않은가. 이것은 물론 사람과의 관계에서 진실된 연합에서 오는 기쁨을 누릴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렇게 살아왔고 진실된 연합에서 오는 기쁨을 경험해보지 않았기 때문에 기대감이 없다. 무언가 잘 알지도 못하는 것에 몸을 던져 상처받고(상처 받을 것이라고 미리 단정한다) 싶지는 않은 것이다. 그러나, 주님이 ‘그 영원하신 팔이 네 아래 있도다’(신 33:27)라고 말씀하셨다. 나는 현재 알지 못하나 그의 명령을 순종해 보려 한다. 그것으로 인해 내가 상처를 받든, 기쁨을 받든지, 아무것도 안하고 거짓된 평안에서 살아가는 것 보다는 나으리라 생각된다.


[3. 정신적 연합]
(상황1) : 아이들이 제 방으러 자러 간 후 남편이 아내의 허벅지에 팔을 두르며 말합니다. "여보, 당신 정말 멋있어요. 사랑해요."
인간의 마음은 미혹에 얽혀 있어 초자연적 도움 없이는 바른 목표를 정확히 찾아낼 수 없습니다. 자기가 원하는 반응을 얻고자 아내를 조작하는 것이 그의 목표입니다. 사랑받고 존중받기 원하는 아내의 필요에는 거의 관심도 없거나 기껏해야 부차적 관심만 있을 뿐입니다. 즉, 일차적 동기가 자신의 욕구 충족을 위해 상대의 응낙을 얻어내려는 데 있다면 그것은 사랑의 위반이며 잘못된 것입니다. 사랑의 본질은 일차적 관심을 상대의 필요에 두는 것입니다.

목표가 타인을 변화시키는 데 있다면 그것은 잘못입니다. 좋은 변화라도 마찬가지입니다. 상대의 필요를 정확히 알고 그것을 바탕으로 사랑하려는 목표가 없는 한 우리는 섬기는 자가 아니라 조작하는 자입니다.

우리는 감정이란(특히 죄책감이나 비탄같이 무거운 것) 카타르시스를 위해 꼭 표출돼야 하며 그렇지 않을 경우 심리적 손상이 불가피하다는 말을 자주 듣습니다.

각자 자신의 희망사항을 하나씩 생각하십시요. 그것이 갈망이면 기도하면 되고 목표라면 열심히 일해 이루어야 합니다. 외부의 도움없이 혼자 힘으로 희망사항의 성취 여부를 통제할 수 있는가? 이에 대한 답이 예라면 그것은 갈망이 아니라 정당한 목표입니다. 아니라면 그것은 본인이 책임질 목표가 아닙니다. 기도해야할 갈망입니다. 대체로 분노란 목표가 무너질 때 생긴다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요. 자신의 감정이 무너진 갈망에서 온 것임을 분명히 알고 섬김의 목표를 계속 고수할 때에만 배우자에게 부정적 감정을 표현할 수 있습니다. 목표대로 안됐다고 부정적 감정을 표현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배우자가 방해할 수 있는 목표라면 애초에 잘못된 것입니다.

감정을 거부하는 가장 보편적 방법은 상대가 기분을 표현할 때 듣는 사람이 자신을 방어하거나 변명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느낌에만 초점을 두어 자연히 상대방의 느낌은 놓치고 맙니다.

=>이 책에서 예를 든다. “프레드는 직장에서 긴 하루를 마치고 퇴근한다. 무의식중에 저절로 생겨나는 목표는 아내 조안이 저녁을 차려 놓고 상냥한 인사와 따뜻한 포옹으로 자신을 맞아주는 것이다. 한마디로 아내의 사랑에 찬 응대이다. 그런데 아내가 이런 말로 그를 맞는다고 한다. ’왜 이렇게 늦었어요? 여섯 시에 온다고 하구선. 벌써 일곱시가 다 됐잖아요.‘ 조안은 프레드의 목표를 무너뜨렸다. 여기서 나의 목표는 무엇일까를 생각해봐야 한다. 사랑에 찬 응대는 나 혼자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기도해야할 갈망/희망사항이다. 그의 목표는 아내에게 자신의 필요를 채워 줄 반응을 요구한 ’조작적인 목표‘인 것이다. 즉 목표를 조작에서 섬김으로 바꿔야 하며 이의 실제적 과정에는 ’퇴근할 때 아내는 왜 기분 좋게 맞아 주지 못할까?‘라는 생각을 ’지금 내 목표는 아내가 사랑받는 특별한 여자임을 느끼게 해주는 것이다‘라는 것으로 생각을 바꾸는, 즉 내가 혼자서 할 수 있는 작업이 포함된다. 즉, 그러한 순간 생각해야 할 것은 ’섬김의 목표를 택할 것인가? 하는 것이다.

목표와 갈망 이것이 좀 헤깔린다. 또한, 섬김을 고수할 때만 부정적 감정을 표현할 수 있다는 것도 잘 와닿지 않는다. 그래서 역추적해보기로 했다. 목표의 좌절이 분노라고 했기 때문에 내가 주로 어떠한 일로 화를 참지 못하고 폭발하나를 본다. 대부분이 사람사이의 관계에서 온다. 예를 들어 나는, 일적인 면에서 나를 다른 사람과 공정하게 대해주기를 원한다. 그러나, (내가 생각하기에) 그 사람이 나를 불공정하게 대해줬다고 화를 낸다. 이 책에 따르면, 이것은 내가 혼자 할 수 있는 일이 아니기 때문에 기도해야할 갈망이 된다. 그러나, 부부나 가족 친구가 아니라 일적인 관계에서 이것을 그대로 적용하는것은 안되지 않나? 사실, 나의 필요는 정당한 것이 아닌가? 나는 ‘정의’를 원하는 것이다. 나의 존재감/중요감/안전감, 나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가 아니다. 그러나, 내가 충분히 그 일을 감당할 수 있음에도 불구 왜 저 사람은 노는데 왜 나는 일을 더해야 하는냐란 비교의 생각으로 인해 불공평하다고 외치는 것이 정의인가? 사실, 또한 그리함으로써 일에 대한 자부심, ‘열심히 일한 당신 떠나라’라고 말한 바와 같이 나의 권리를 눈치 안보고 당당히 주장하고 있지 않은가?
직장내에서 섬기는 것은 무엇일까? 누구나 자신만 일이 많다고 불평하고 이것은 자신의 일이 아닌데 왜 해야하느냐고 자신이 자신의 일의 범위를 정해서 스트레스 받고 불만을 표출한다. 이에 대한 해결책은 무엇일까? 내가 누군가에게는 이리 말한적있다. '누가 일이 당신일인지 아닌지 결정하냐고, 왜 그것을 주제넘게 당신이 결정하냐고?' 그러나 웃긴일은 내가 그사람의 입장이 되었을 땐 내가 일의 범위를 정하고 그 일의 범위를 넘어서서 일을 주게되면 불공평하다고 분노를 표출했던 것이다. 크리스챤 메뉴얼 저자가 말한 바와 같이 한없이 주관적이고 자기중심적인 것이다.


[5. 육체적 연합]
인간은 최고의 기쁨과 만족은 오감을 통해 오지 않는다는 진리를 잃어버렸습니다. 그리스도인마저 인격적 고통을 육체적 쾌락으로 떨치려 합니다. 거부나 두려움이나 고독이나 공허감으로 괴로울 때 육체적 감각을 자극하여 괴로움을 피하고 싶은 유혹을 떨치기란 쉽지 않습니다.

부부간의 육체관계에서 다루기 힘든 인격의 요소가 개입되어 있는 경우, 감정을 극복하는 작업이 필요하며, 그만큼 깊은 통찰과 고통이 따릅니다. 사람들이 육체적 연합이라는 좁고 험한 먼 길을 떠나 흥미를 좇는 섹스라는 넓고 편한 지름길을 찾는 한 가지 확실한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나의 필요를 채우기 위해 상대를 조작하려는 목표를 상대의 필요를 채우기 위해 내가 섬긴다는 목표로 과감히 바꾸십시오. 이 변화가 일어날 때 세가지 파괴적 감정은 서서히 사라질 것입니다. 첫째, 섬김의 목표는 배우자로 인해 방해받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배우자에게 분노를 느낄 일이 없습니다. 둘째 섬김의 목표는 본인의 의지에 의해서만 성취 여부가 좌우됩니다. 따라서 상대가 어떻게 나올까하는 불안이 사라집니다. 셋째, 주님 뜻대로 배우자를 대한다는 목표는 도달 가능한 것입니다. 적어도 기본 방향은 고수할 수 있습니다. 누구나 실패할 수 있지만 자백과 용서, 회개와 능력의 자원이 있기에 언제가 다시 시작해 계속 성장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죄책감에 시달릴 이유가 전혀없습니다.

=>문제가 닥쳤을 때의 행동을 보면, 자극적인 음식을 먹고 자는 경우가 있다. 내심으로는 내일이 되면,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지겠지하면서 사실 가만히 있어도 문제가 사라지기를 바라는 것이다. 이것은 바쁘거나 다른 사건이 터짐으로 잊혀진다. 그리고 또 그러한 문제가 반복된다. 그러나 공허함, 나 자신에 대한 실망 등의 문제는 내가 해결할려고 용을 써도 나로서는 해결될 수 있는것이 아니지 않나? '너는 최고다'라는 자기 최면을 걸면되나? 나보다 못한 사람들을 보면서 나의 상황에 위안을 삼아야하나? 이것은 일시적인 효과는 줄 수 있으나 그것도 안먹히는 상황이란 것이다. 이에 대한 답은 한가지 밖에 생각나지 않는다. 하나님께 기도하고 내 문제를 모두 말하고 내가 할 수 없는 부분들에 대해 부디 채워주기를 간구하는 것이다. 지혜있는 사람들이 그리 말하니 지금으로서는 그것을 하는 방법밖에 없다.


[결혼의 기초]
'기분이 들든 말든 아내를 사랑하고 남편에게 복종하라'는 말은 문제의 뿌리에 도끼를 갖다 대지 못합니다. 순종의 기반으로 하나님의 선하심을 바로 알지 못하면 그런 격려는 기껏해야 분노와 불화의 잡초의 번식을 막는 역할밖에 못합니다. 숨은 뿌리덩굴을 찾아 뽑는데는 역부족입니다. 꽃은 있지만 그 꽃은 깨어진 약속이 자란 흉한 결과입니다. 순종의 권면은 중요하고 옳습니다. 그러나 그 권면을 기쁘게 받아들이려면 먼저 하나님의 선하심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우선 순위를 내 행복이 아니라 상대의 행복에 두는 것은 왠지 손해 같습니다.그런 태도로 사는 한 우리는 보상을 조건으로 결혼 서약을 지키는 것입니다. 배우자에게 준 만큼 나한테도 돌아올 때에만 약속을 지킵니다. 결국 보상은 점점 줄어듭니다. 내 행복과 상대의 행복 중 택일해야 하는 순간마다 결혼의 헌신은 마치 자유와 기쁨을 송두리째 앗아가는 감옥처럼 느껴집니다. 자연히 헌신 쪽을 택하면 형기를 치르는 기분을 떨칠 수 없습니다. 배우자에게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아무리 거듭 확인하여 살아도 우리는 계속 상대에게 많은 것을 바랍니다. 친밀함과 감정적 지원과 존경과 인정과 성적 만족과 그 이상의 것들을 원합니다. 이런 갈망이 있기에 상대의 행동이 기대에 어긋나면 기분나쁘고 속상합니다.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면 상대의 어떤 행동도 아픔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배우자에게 바라는 것이 있으며 마땅히 그래야 합니다. 하지만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면 어쩔수없이 불쾌감이 듭니다. 이 상처와 불쾌감이 어떻게 원한으로 악화됩니까? 불쾌한 사건이 일어나자마자 빌은 (대개 무의식중에) 그 사건을 평가합니다. 사건을 자신의 필요와 연결시켜 해석할 수도 있고 갈망과 연결시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자신의 자존감이 아내의 인정에 달려있다고 믿는다면 아내의 못마땅한 행동을 자신의 중요감의 필요에 대한 심각한 위협으로 오판할 것입니다.

'감정을 아내에게 털어놓아야 하는 것 아닙니까?' 라는 질문에, '그것은 감정을 털어놓는 목표에 달려 있습니다. 당신의 모든 일은 한 가지 목표에 부합해야 합니다. 바로 섬김입니다. 아내의 불륜이 생각나 괴롭다고 말하면 그 말을 들은 아내는 분명 죄책감과 좌절이 커질 것입니다. 당시의 진짜 의도는 그렇게 털어놓음으로 아내를 벌하려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용서와 섬김의 결단에는 상한 감정을 다시 말하지 않는것도 포함됩니다. 아내의 불륜이라는 사건에 대해 아내의 과오를 남자로서 자신의 중요감과 연결시키기 때문에 일차 감정 불쾌감이 원한으로 비화됩니다. 그렇다면 원한의 치유책은 재헌신의 노력이 아니라 사고의 교정입니다. 아내의 죄를 자신의 필요에 대한 위협이 아니라, 갈망의 장애물로 보지 않는 한 원한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마음에 배우자의 거슬리는 행동이 떠오를 때마다 다음 사실을 강하게 반복 주장해야 합니다. 어떤 일이 일어나도 그리스도 안에서 나의 안전감과 중요감은 흔들리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상대의 거슬리는 행동이 마음에 되살아날 때마다 '내 필요는 그리스도 안에서 다 채워졌다'는 진리를 즉각 떠올리는 것이 바로 접근의 열쇠입니다.
수용하려면 상대가 상처 줄 때마다 계속 용서해야 합니다. 용서의 작업에는 배우자의 최악의 행동도 내 인격의 기본 필요와는 절대 무관하다는 태도가 필요합니다. 이 진리가 마음속에 확실히 자리잡고 있어야 상대가 기분 상하게 해도 두려움이나 의무감 없이 자원함으로 섬길 수 있습니다

=>베드로가 '일곱번 용서하면 되겠습니까?' 하자 예수님이 '일곱번을 일흔번까지도 하라'고 하신다. 인간적인 생각으로는 내 희생을 이용하는 것 아니냐? 상대방은 맘대로 잘못저지르는데 왜 내가 그를 용서하고 나만 괴로워하고 용서해야하느냐? 라는 생각이 먼저 든다. 그러나, '용서해 봤어? 해보지 않았으면 말을 하지 말어' 라는 요즘 유행하는 말처럼 내가 해보기는 했나라는 생각이 든다. 겨우 한번도 제대로 못하지 않은가. 하면은 하나님이 하늘의 상급을 주신다지 않은가. 좀 믿고 쫌 해보는 시늉이라도 해봐야지 않겠는가.

크리스챤 매뉴얼 - 윤동일

[책과 의견]
1. 신은 있다 : 신론
개미들은 인간이 존재한다는 것을 어떻게 증명할까? 신은 증명되어 믿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믿으면 증명이 된다. 믿었더니 경험되는 것이 신이다. 그래서 믿음은 신의 영역이며 선물이라 한다.
=> 신의 존재에 대해서는 내가 용을 쓰며 이해하려고 하면 할수록 오히려 더 수백가지의 의문만든다. 개미가 인간이 존재한다는 것을 증명할 수 없는 것처럼 증명하기를 포기하고 믿으면 된다고 한다. 믿음으로써 경험하게 된다고 한다.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이론)을 해보면(실험) 알게 되는 것이다.
최근의 일로, 말을 조심하라는 성경말씀(이론)이 있고 아침에 QT를 하면서 다시 한번 그 말을 새겼다. 예전에는 준비가 되어 있지 않더라도 일단 말을 시작하면서 두서없이 말하거나, 내 의견을 강조하다 극단으로 치닫는 경우도 있어, 하고 난후 후회한 경우가 있다. 공교롭게도 그 QT를 한 당일날 특정일이 발생했고, 촉박하게 그것에 대해 하나님께 물었고, 물론 답을 해주시지 않았고, 단지 아침에 QT했던 ‘말을 조심하라’는(이것이 답인가?) 말만을 내가 가지고 있었고, 또한 내가 준비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일에 대해 아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말씀을 따랐는데(실험) 그랬더니, 아무말도 하지 못하고 나온 내가 바보같았고 억울하기만 하였다. 차라리, 좋은 언변을 주시지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봤을 땐, 아무말도 하지 않은 것이 나았다. 그 자리는 일방적 통보의 자리였고, 분명 나는 그 자리에서 말을 시작하면, 두서없이 나열하고 분노만 방출하다 나왔을 것이고, 또한, 그것은 내가 그 문제에 대해 그 사람에게 왈가왈부하기에는 주제넘은 짓이기도 하며, 내가 움직이게 해야 할 사람은 다른 사람이기도 한 것이다. 결국 다시 한번 QT의 중요성과 비록 작은 사건이었지만 하나님 말씀은 직접 실행해봐야 알수 있음을 안 사건이었다.
하나님을 어떻게 증명하냐고? 그것을 말로 설명하기는 어렵다. 오히려 의문과 언쟁만 유발한다. 단지, 직접 체험해보라는 것 밖에는. 그것은 현재 나에게, 그리고 그대에게 해당되는 말이다.

2. 인간 사용 설명서 : 인간론
몸이 고통스러워하는 것들은 몸에는 다 좋은 것들이다. 선한 일을 멈추면 오히려 잠이 잘 오고 몸은 편하다. 선한 일을 어렵게 습관들여도 몇 번만 쉬면 금방 원상태로 돌아오는 것이 우리다. 죄된 자리로 돌아오는 관성은 얼마나 큰지 모른다. 그러나 선한 일로 돌아가는 복원력은 전혀 없다. 이것이 우리가 죄성을 가졌다는 증거이다. 사람은 모든 일을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하고 결정한다.

오스카 와일드는 말한다. ‘누구든 친구의 고통에는 공감할 수 있지만 친구의 성공에 진정으로 공감하려면 대단히 고운 심성이 필요하다.’
=>내가하면 사랑, 다른 사람이 하면 불륜이라는 말처럼 사람은 한없이 자기중심적이다. 또한, 서면 앉고 싶고, 앉으면 눕고 싶은 것이, 육체적 편함을 좇는 것이 사람이다. 늦바람이 무섭다는 것처럼 일평생을 한결같이 살아온 사람도 그러한 습관을 버리고 쉽게 죄성에 젖게 되는 것이 인간이다. 어디 갈 것도 없이 나를 보면 안다. 누가 성선설을 주장했는가? pure 한 선함이 있는지 의심스럽다. 한 예로 지금 내가 친구를 도와준다. 이웃사랑의 실천을 하는 아름다운 모습이다. 그러나, 그 속내를 보면 언젠가 그가 내가 필요할 때 도와주겠지 하는 마음이 있으며, 나의 선행으로인해 나 자신이 ‘나, 이런사람이야’라는 교만의 마음도 가지고 있는 것이다. 모든 선한 일들이라고 하는 것들의 배후를 보면, 나의 허영, 교만 등의 시컴한 속내가 있지 않은가. 사람은 그저 악하다는 말 이외 무엇이 더 있을까?

3. 아빠 하나님 : 성부론
부모가 자녀를 낳는 것은 노동력 확보를 위한 게 아니다. 사랑하기 위해서 낳는다. 하나님이 우리를 창조하신 것도 일을 시키기 위한 게 아니었다. 사랑하기 위해서였다.

목자가 잃은 양 한 마리를 찾아 떠났다고 하면 우리는 대부분 아흔아홉 마리 걱정을 한다. 자신이 아흔아홉 마리 양 중에 속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성경 속 보물을 쉽게 찾는 방법이 있다. 성경 속 등장하는 인물 중에 최악의 사람과 자신을 동일시하면 된다. 예수님과 가롯 유다가 있으면 자신을 가롯 유다라는 전제로 말해야한다.

믿어주는 만큼 사람은 변화된다. 많이 믿어주면 많이 변화되고 적게 믿어 주면 적게 변화된다. 사랑하면 믿어주고 믿어주면 기회를 준다. 믿어줄 수 있는데 기회는 줄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은 거짓말이다.

남을 비판하는 것처럼 쉬운 비판도 없다. 남을 비판하면 정의감도 불타오르고 카타르시스도 있다. 우리말에 ‘욕하며 닮는다’는 말이 있다. 남의 약점을 욕하는 사람은 자신이 욕한 그 부분을 그대로 닮는다는 말이다. 사람이 40대가 되면 자신이 싫어했던 아버지의 모습을 판에 박듯 닮아 있음을 알고 소스라치는 경우를 많이 봤다. 바라봄의 법칙 때문이다. 어느 부분을 싫어했다는 말은 그것을 생각하며 살았다는 말이다. 사람은 자신이 바라본 것을 그대로 닮게 되어 있다. 대신 자신을 비판하는 것은 감성을 깨운다. 다른 사람의 마음을 움직여 감동시킨다. 자기 개혁을 해내는 사람은 세상을 개혁할 능력이 있다고 검증된 사람이다.

죄지은 당사자가 죽는 것이 정의이다. 그러나 죄 없는 예수님이 대신 죽으셨다. 이것은 지상 최대의 불의이다.

4. 구원자 예수님 : 성자론
세상은 우리를 사랑하지 않는다. 써먹다가 쓸모가 없어지면 폐기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정신없이 살다가 나이가 들어 은퇴할 때가 되어서야 이런 현실을 알게 된다. 울고불고 세상과 직장이 나에게 그럴 줄 몰랐다고 해보았자 때는 이미 늦었고 소용이 없다. 사람들은 이것을 잊고 우리를 사랑하지 않는 세상에 목을 매고 살아간다. 세상의 모든 부귀영화를 맛본 솔로몬 왕이 말했다.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었다.’
=>하나님은 인간을 만드셨다. 인간은 사단의 꼬임에 넘어가 하나님을 불순종하고 죄가 지배하게 되었다(생각해보니, 사단의 꼬임전에 인간은 원래 죄성을 내재하고 있었던 것 아닌가?). 죄의 삯은 사망이다. 사망하지 않으려면 누군가 대신 나를 위해 죽어야한다. 따라서, 완전무결한 예수님이 과거, 현재, 미래에 지을 나의 죄를 위해 대신 죽으셨다.
그러나 결국은 ‘그것이 뭐?’ 란 얘기가 나온다. 하나님을 믿는다면, 예수님 그리고 성령님까지 옵션으로 해서 같이 믿는 것이다. 즉, 예수님, 성령님에 대한 어떤 이야기라도 믿을 준비가 되어 있는 것이다. 굳이 예수님이 죄가 없도록 하기 위해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 사망을 이긴 것에 대한 증거로서 부활하고 하신 이야기들을 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물론 그렇게 설명함으로써 구원의 역사 전반 걸친 하나님의 치밀하심, 준비하심 등을 부가적으로(또는 논리적이라고 주장하는) 설명해줄 수는 있지만 오히려 그런 이야기는 무수한 의문들만 더 유발시키는 점이 있다. 예를 들자면, 동정녀가 아기를 가질 수 있나?, 어쨌든 정자는 하나님의 영이지만 난자는 여자 것이니 정자, 난자로부터 각각의 DNA가 분리되어 결합하여 아기가 탄생되는 것인데 그럼 반쪽은 인간에게서 나온 것이니 예수님도 죄의 본성을 가지고 있지 않겠느냐?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심으로 인해 죄를 완전히 무찔러버리시지 왜 힘만 약해지게 만드시고는 나머지를 우리에게 맡겼느냐 등 의문만 더 생기는 것이다. 또한, 예수님의 존재는 무엇이냐. 심판의 날, 그날은 ‘아들’도 모른다는데 하나님=예수님=성령, 같은 분 다른 형태라고 생각했는데 그럼, 하나님이 더 파워가 센 것인가 등등의 의문만 더 일으킨다.
이런 나를 보면 참 어지간히도 반항하는구나라는 생각이 든다. 중요한 것은 그것이 아닌데 왜 주변적인 것들, 인간의 머리로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을 가지고 그리 따지느냔 말이다. 예전에는 예수님 부활, 성령님, 등등등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시니 그렇게 하셨겠지라고만 생각했는데, 사람이 나름대로 만들어 놓은 구원의 역사에 대한 논리(?)를 대하다보니 그 논리의 곳곳에 의문만 생긴다.


5. 보혜사 성령님 : 성령론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롬 8:26)
이미 구원받은 사람들이 이제부터 기도해야 할 것이 있다. 성령이 완전히 지배하기를 구하는 기도이다.
=>변하는 사람보다 예수님이 남기고 간 성령님과 친해지고 싶다. 성령이 완전 지배하도록 복종하면 능력도 주신다지 않은가? 그래서, 책을 읽으면서도 어떻게 하면 성령님과 교제를 하고 또 복종하는 방법에 대해 제시해주지 않을까 싶었으나,,,, 없었다.
책에서의 저자의 경우, 결단을 내리거나 어떻게 해야할 지 모를 때 ‘성령님, 내가 여기서 무슨 말을 해야합니까?’ 하니 답을 주셨다. 얼마나 멋져 보이고 편해 보이는지 나도 그렇게 되고 싶단 말이다. 그래서 나도 어찌해야할지 모를 때, 애매할 때 해보았다. 묵묵부답. 성령님의 양식은 말씀이라고 들었다. 말씀도 읽어보았지만, 묵상을 깊게 안해서 그런건지 답이 안보이더라. 그래서 부족한 부분이 무엇일까 생각해보니, 지금 내게 필요한 것은 3분라면처럼 즉석에서 빨리빨리 주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좀 더 시간을 가지고 깊이 묵상하는 것이 필요할 것으로 결론을 내렸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성령의 능력을 활용하라고 하는데, 이것은 내가 하나님께 간구하는 것과 무엇이 다른지 모르겠다. 내가 하나님께 언변의 능력을 달라고 간구하면 하나님이 그것을 들어주시면 나에게 그런 능력이 생기는 것 아닌가? 그럼, 여기서 성령의 역할은 무엇인가? 굳이 성령을 내가 의식하지 않고도, 하나님과의 교제를 하면 성령님이 하나님 지시를 받아 하는 것 아닌가? 성령님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친히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신다면’ 그렇다면, 나는 굳이 간구할 필요 없지 않은가? 나는 하나님, 예수님, 성령님을 굳이 구분하지 않고 대표(?)인 하나님과만 일대일 교제를 하면 되지 않을까?

6. 부름 받은 사역자 : 은사론
훈련은 자신의 노력과 시간의 투자로 얻어지는 결과이므로 자랑하고 교만해 질 가능성이 있다. 자신의 노력으로 얻은 결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은사는 하나님이 주신 전적인 선물이므로 자랑하지 않게 된다. 자신의 노력으로 은사가 주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내가 가진 은사란 무엇일까 생각해본다. 윌로우 크릭 교회에서 시행하는 ‘맛보기 사역’은 그런면에서 자신이 가진 은사를 발견할 수 있는 좋은 프로그램으로 보인다. 즉, 수백가지의 다양한 프로그램을 제공하여 체험하도록 하고, 또한 실패하더라도 정죄하지 않으며 다시 한 번 기회를 주어 자신이 가진 은사를 발견할 수 있게 한다.
중요한 것은 은사 이전에 사랑의 마음을 가지는 것이며, 은사 이후에 그것을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을 위해서 사용하는 것이다. 또한, 누구나 다 처음은 서투를 수 있다. 그러한 부분을 믿고 지원해주는 사람, 교회가 필요하다.

7. 사단이 주는 나쁜 선물 : 죄책감

8. 주여 어서 오시옵소서 : 종말론
스티브 잡스는 2005년 스탠퍼드 대학의 강연에서 죽음에 대하여 이렇게 말했다. ‘곧 죽는다는 생각은 인생의 결단을 내릴 때마다 나에게 가장 중요한 도구였다.’
=>나는 나에게 유리한 것들은 잘 기억한다. 계속해서 넘어지고 넘어지는 나를 보면서 이런 내가 어찌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냐란 생각이 드는데, 이런 죄책감이 사단이 주는 것이라니 넘어지더라도 뻔뻔히 다시 나가는 내가 돼야겠다. 그러나, 나에게 있어 문제는 이러한 것을 이용하는 것이다. 일부러 넘어지면서(유혹에 빠져 쾌락을 즐기고) 나중에 다시 회개하고 나가면 되겠지 하는 생각을 하는 것이다.
또한, 죽는다는 생각을 하면 지금 앞에 닥친 문제들, 어려움이 하찮게 느껴진다. 지금 고뇌하고 있는 부분들이 너무나 작게 느껴진다. 그러나 여기에 함정이 있는 것이 그 생각으로 인해 똑바로 살자, 하루를 열심히 살자, 지금 닥친 고난은 아무것도 아니다라는 생각보다는, 어차피 죽을 것 막나가자, 대충하자, 또는 즐기자는 생각이 더 든다는 것이다. 아직도 하나님(심판) 두려운 줄 모르고, 바로 눈 앞에 있는 달콤함에 정신이 팔려있는 것이다. 아, 알면알수록 자유로워진다는데 왜 나는 점점 더 두려워하는 마음만이 더 들까.


일반적으로 매뉴얼이란 사용설명서로 특정 제품에 대한 기술, 사용방법등을 설명해 놓은 책이다. 전제적으로 이 크리스챤 매뉴얼 책은 오히려 질문만 더 유발하고 답을 주지 않는 책이었다. 즉, 일상적인 소소한 이야기들을 묶어 놓은 책으로만 느껴진다

구원이란 무엇인가 - 김세윤

[책속에서]
[믿음은 하나님의 자원으로 살아가는 삶의 실재]
하나님에 대한 순종 없이 하나님을 의존하는 것이 가능합니까? 하나님께 의존한다고 주장하면서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는다면 그것이 하나님께 대한 의존입니까? 자기가 스스로 상상해 낸 것을 자기가 믿기 때문에 결국 자기를 믿는 것입니다. 전지하시고 사랑이 완전하신 하나님은 이 길로 가는 것이 생명의 길이라고 하는데, 나는 자꾸 저 길로 가야 내게 좋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나에게 축복해달라고 하나님께 새벽 기도도 드리고 철야 기도도 열심히 합니다. '하나님도 내가 이용할 수 있다, 내가 열심히 기도하면 하나님도 꼼짝 못하게 할 수 있다'는 식의 생각, 바로 이것이 내 꾀의 절정입니다. 이것이 가장 큰 교만이요. 하나님과 가장 크게 분리된 상태입니다. 결국 순종이 없는 믿음, 윤리가 포함되지 않은 믿음, 이것이 곧 미신입니다.
[예정교리]
예정교리는 성경대로 믿음의 현재라는 시점에서 내가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구원의 계시를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구원에 대한 확신을 가진 현재에서 되돌아보아야 합니다. 이렇게 주님을 믿는 자가 되어 그리고 현재 나의 믿음에 대해 생각해 봤을 떄, '아! 분명히 내가 믿기 전에 내가 알지도 못하는 사이 성령께서 내게 임사셔서 그의 은혜로 나의 보지 못하는 영적인 눈을 뜨게 하시고, 나로 하여금 십자가에 달린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하게 하고, 그가 나의 죄를 위해 돌아가셨다는 것을 받아들이게 하고, 나의 강퍅한 의지를 꺽어 그에게 순종하게 했구나'하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곧 내가 믿는 순간에는 그 복음을 받아들이겠다고 내가 결단한 듯했으나 믿는 자가 되고 보니 나로 하여금 믿도록 성령께서 미리 역사하셨구나 하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니까 믿음 자체가 선물입니다. 하나님이 내가 알기도 전에 내 안에 역사하셔서 나로 하여금 복음 들을 기회를 주실 뿐 아니라 그 복음을 깨달을 수 있도록 내 속에 미리 역사하셨다면 하나님이 나를 구원하려는 의지가 있으셨구나하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이 나를 구원하시려고 예정하셨음을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의 구원과 계획, 그분의 예정에 의해 내가 전적으로 은혜로 말미암아 구원받았다는 예정의 교리가 없으면 믿음이 내가 하는 자유의지의 결단에 의해 생기고 구원이 내 믿음에 달려 있게 됩니다. 부모님이 교통 사고를 당하거나 해서 삶이 극심한 고난 가운에 처하면 '왜 이러나, 하나님이 안계신가 보다'하고 믿음이 바닥나기 일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구원이 인간의 믿음에 달려 있다면 우리의 구원은 얼마나 불안합니까?
[부록 : 예수는 어떤 메시아인가]
출애굽 : 모세가 광야에서 기적적으로 만나를 먹임유월절 : 예수께서 광야에서 오천명을 먹이심 유대인들은 '이 예수가 진짜 제2의 출애굽의 구원을 이루겠구나! 로마 압박자들을 몰아내고 제2의 출애굽의 구원, 자유와 풍요와 정의의 샬롬을 이룰 구원자가 왔구나!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를 메시아로 추대하고 왕으로 삼으려고 했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부응하지 않고 도망가셨습니다. 유대인들은 밤새 예수님을 뒤쫓아 다녔습니다. 바로 이 사건에서 그들의 메시아적 갈망, 정치적 자유와 경제적 풍요와 사회적 정의를 가져오는 메시아에 대한 그들의 갈망이 절실히 나타납니다. 유대인들은(이 세상 사람들의 대표로서) 항상 물리적인 혹은 이 세상적인 또는 육신적인 관점에서만 생각합니다. 메시아는 제2의 출애굽의 구원을 이룰 자로 기대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메시아는 제2의 다윗으로서든 제2의 모세로서든 정치적 자유, 경제적 풍요, 사회적 정의 등을 가져오는 자로 이해된 것입니다. 이 유대교적 관점에서 예수를 봤을 때, 예수가 메시아로 보였겠습니까? 그러기는 커녕 도리어 스스로 무참히 처형되었을 뿐 아니라 그를 따르는 사람들로 하여금 고난만 받게 하고 쫓기며 죽임을 당하게 하지 않았습니까? 보수적 그리스도인들도 신학적인 논리로는 구원을 영혼의 영역에 한정하려고 주장하지만, 실제의 삶에 있어서는 그리스도가 그들에게 육체적 건강, 사업에서의 성공, 시험 합격등과 같은 이런 세상적 가치들을 가져다 주기를 간절히 비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들도 내세에서의 영혼 구원은 관념의 세계에 묶어 둔 채, 실제로는 해방 신학자들같이 그리스도의 구원을 이 세상적 가치들에만 축약시키는 경우가 많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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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우리가 구원받아야 할 이유
땅에서 뽑힌 풀 한포기를 보면, 무한한 영양공급을 주는 자원, 땅, 물 등으로부터 분리된 상태이다. 광합성의 요소가 되었던 햇빛은 타는 듯한 갈증을 일으키며 시들게 하는 촉진제가 되고, 영양분 공급원은 차단되어 그 안에 내재되어 있는 양분으로만 버티다 결국은 시들고 병들어 죽고 마는 것이 운명이다. 뽑혀진 풀포기처럼, 우리 인생은 아등바등 살거나 또는 그러한 상태에서 스스로를 구원하려하지만 자원의 한계로 인해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다.

내가 구원받아야 할 이유가 무엇일까. 비단 나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사람들이 구원받아야할 필요성을 못 느끼지 않을까. 즉, 이 책에서는 위와 같은 비유를 들어 우리의 삶을 한탄하지만, 아쉽게도 뽑혀진 풀 한포기인 나는 그러한 상태인지를 모른 채 바람에 이리저리 날리며, 그리고 주변의 숱한 풀포기들과 같이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다. 바빠서일까 아니면 생각없이 다수를 따라가는 것이 편해서일까. 우리의 생활을 들여다보면, 개인의 일생에서는 학생→대학→취업→결혼,자녀→노년의 절차를 숨 가쁘게 거치고 사회적/환경적으로는 봄여름가을겨울의 구분 없이 밤낮없이 생존경쟁이 더 치열해지는 사회에서 살고 있다. 이렇게 살다 가끔 내세에 대한 불안이 있으나 또다시 바쁜 일상 속으로 파묻혀버리게 되거나 답이 없는 어려운 문제라고 회피하는 것이 나의 삶이다. 이런 구조를 보면 구원이니 내세니 생각지 못하도록 일부러 이렇게 만들어 놓은 것처럼 삶이 아귀가 잘 짜여져 있는 것 같다.

그래서 실제의 삶에 있어서 구원, 즉 육체적 건강, 사업에서의 성공, 시험 합격 등과 같은 이런 세상적 가치들을 준다고 하는 ‘복을 주는 하나님’에 혹하는 것이다. 사실, 대부분의 교회들이 하나님을 믿게 되면 일이 잘 풀리고 복이 있다는 얘기로 사람들을 처음에 꾀지 않나? 또한, 간증하는 사람들도 보면, 고난 끝에 복이 있다는 얘기들을 하고 있지 않은가. 유대인들처럼, 구원을 통해 현세에서의 삶의 경제적, 정신적 풍요로움을 바라는 것이다.

복을 바라며, 또는 내 안의 허무함을 채우기 위해 등등의 이유로 구원을 간절히 바란다고 하자. 경제적 풍요, 사회적 명예 등과 같은 가치들은 굳이 하나님, 예수님으로부터가 아니라도 사람이 열심히 노력하면 세상으로부터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해서 육체적으로 영생을 하는 것도 아니다. 구원은 죄로 인해 영영 죽을 나를 해방시켜주는 것이다. 즉, 구원은 내세에 나를 살리는 것이고 현세에 적용한다면 죄로부터 자유하게 살아가도록 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죄가 왜 그리 나쁜지, 죄의 삯은 사망이란 뼈저린 인식, 내세에 대한 소망이 필요하다.

2. 사람은 스스로를 구원할 수 있는가?
3. 예수의 삶과 죽음과 부활은 구원의 사건이다
4. 예수의 구속적 죽음에 대한 해석의 성경적 범주들
5. 하나님의 구원과 주관적 적용

성경에서도 말씀한바와 같이(로 7:23, but I see another law(A) at work in the members of my body, waging war against the law of my mind(B) and making me a prisoner of the law of sin(C) at work within my members. => A가 C를 발화) 기본적으로 악한 본성을 가지고 있는 나는 죄의 법을 만났을 때 오히려 촉진되어 결국 죄의 노예가 된다. 즉, 오로지 나로만 채워진 내 자신으로서는(유한자원 = 악한 본성 + 내 마음의 법(양심?, 나약함) + 죄의 법) 스스로 구원을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예수님을 믿음으로써, 그의 영이 내 안에 함께 거함으로써(‘나’라는 유한자원 + ‘영’의 무한자원 투입), 죄의 법에 대항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삶과 죽음이 나에게 어떻게 적용이 되는가? 죄의 삯은 사망이며, 죽을 수 밖에 없는 나 대신 예수님이 나의 죄를 위하여 죽음으로서 나는 ‘죄의 형벌’로부터 자유로워졌다. 또한 그러한 예수님을 믿음으로써 나의 안에 성령을 보내주심으로서 나는 죄에 대항할 파워를 가지게 되었으며, 하나님에 대한 새로운 관계, 의인됨(justification), 화해(reconciliation), 하나님의 아들됨(adoption), 새로운 피조물(new creation)을 정립하게 된다고 한다.

이전보다는 좀 더 구원에 대해 이해하게 되었지만, 관념으로만 제한되며 나의 생활로 드러나지 않는다. 나는 이해를 못해서인가(지성). 감정이 메말라서인가(감정적으로 심히 무디긴 하다, 감정). 믿음이 부족해서인가(믿음). 현세에, 바로 목 전에 벌어진 사건들에 바쁘게 메여 살기 때문인가(바쁨), 현세적인 가치들을 중요하게 여기기 때문인가(탐심). 사람들은 어떻게 예수님의 죽음이, 자신의 죄를 대신한 죽음이란 것에 깊이 공감하고 예수님, 하나님의 은혜에 눈물을 흘리는 것일까?

6. 구원의 종말론적 구조
7. 예정과 지키심

이처럼 구원이 인간의 나의 믿음에 달려있다면 구원은 얼마나 불완전하고 불안한가. 그래서 예정교리가 있어서 나에겐 다행이다. 그러나 예정교리가 “하나님의 뜻을 지켜 순종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확신을 가지도록”하는 것을 주요 내용으로 하더라도 여전히 “그의 의로운 판단에 따라서 악과 함께 강팍케 됨으로 내버려두는 사람들”, 즉 내 가족, 친구가 될 수 있는 그들은 어떻게 될까하는 의문은 남는다(결정론적 사고방식). 그러나 결정론이 아니라 예정론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은 변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따라서 우리가 어차피 예정된 사람들은 택할 것이고 아닌 사람은 아닐 것이라고 단순히 생각함으로써 우리자신 또는 이웃에 대해 손을 놓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환경, 마음을 변화시켜주도록 하나님의 뜻을 바꾸어 주십사 우리는 노력해야하는 것으로 보인다.
또 다른 극단으로 빠지는 것이 알마니안주의로 구원은 사람의 믿는다는 자유의지 행사, 믿는 행위가 조건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즉, 자신의 노력으로 인해 구원받을 수 있다는 것을 강조한다. 이러한 경우의 위험은 내 자신의 믿음이 연약할 때, 많이 넘어질 때 ‘이런 내가 어떻게 하나님의 자식이냐’는 생각을 가지고 결국 하나님과의 관계를 피하고 구원까지 의심하게 되는 경우를 초래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구원을 결정론으로 바라보는 경우, 나의 내면에 어차피 결정된 것, 따라서 노력하지 않으려는 속셈이 있으며, 알마니우스적 신앙의 내면에는 하나님이 아니라 ‘나’를 우선하는 경우가 있다. 이러한 면들은 모두 나의 편의 또는 ‘나’ 중심이라는 욕구를 만족시키는 면이 있다.
따라서 예정교리는 교리가 제시하려고 하는 것과 같이, 나에게 하나님 자식으로 간택 받음, 하나님을 두려워함으로써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아바,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친근함, 불완전한 나를 채워주는 자신감, 확신을 준다.
이 책 어렵다. 술술 넘어가면서 읽긴 했다. 그러나 내가 읽으며 이해한 것이 이해한 것이 아니었다. 이 때문에 예정교리, 구원 등에 대해 찾아보고 다시 생각해보게 되었다. 개념 정리는 대략 된 것 같지만 아직은 그것이 내 관념의 틀에 묶여 있다. 내 나름대로의 받은 생각과 이해들을 두서없이 적은 것이라 해석에 오해가 있을 수도 있으리라 본다.
*****예정교리(구원의 확신을 위한 교리로서)*******************************************************
[일부 출처 : http://www.voice21.com/41th/dogma.htm]
우리는 예정이라는 단어를 흔히 '모든 것이 결정되어 있다'는 의미로 이해하기 쉽다. 그러나 그것은 오히려 '결정론' 또는 '운명론'과 가까운 말이고, 성경에서 말하는 예정은 어떤 역사적 사건들이 이미 정해진 하나님의 계획이나 결정에 따라 발생한다는 것이다.
도르트 회의 결정 문서에서는 "하나님은 택자들의 마음을 은혜로부터 부드럽게 하시고 믿도록 하시며, 그의 택자들이 아닌 자들을 그의 의로운 판단에 따라서 그들의 악과 함께 강퍅케 됨으로 내버려두심"과, "이는 그 선택이 불변의 하나님의 작정임과 하나님의 뜻의 자유롭고 기뻐하심에 따른 것"이라고 쓰고 있다. 예정 교리는 구원의 사역에 있어서 결코 인간이 중심이 되거나 그에게 어떤 역할이 주어지는 것이 아닌, 오로지 하나님의 은혜로서만 이루어짐을 명백히 나타내는 교리이다. 그래서 인간으로 하여금 구원받은 기쁨으로 오직 하나님께만 그 감사와 영광을 돌리도록 하게 하신 것이다. 다른 예로 '펠라기우스'나 '알미니우스'적 신앙으로 돌아서 버리는 것인데, 이들의 특징은 열심과 노력, 의지에 따르는 신앙, 즉 신앙의 근거를 자기 자신에게 두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 중심의 신앙이 아닌 자기 중심적 신앙이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3장 8항에는 다음과 같이 예정론의 유익(有益)을 소개하고 있다. "지극히 신비로운 예정의 교리는 특별히 지혜롭고 조심스럽게 다루어져야 한다. 예정의 목적은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뜻을 지켜 순종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그 자신들이 효과적으로 부름을 받은 사실과 영생 얻은 줄을 확신케 하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이 교리는 하나님께 찬송과 경외와 존귀를 돌리게 되며, 진실히 복음에 순종하는 자들은 이 교리로 말미암아 겸손해지고 근면해지고 풍성한 위로를 받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