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속에서]
나의 담은 작고 낮았기 때문에 어떤 사람들은 담이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더군요. 그래서 담에 부딪쳐 넘어지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이것은 질투라는 이름의 돌인데 반드시 치워버려야만 한단다!'
어떤 때는 그 돌을 치우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며칠 동안은 순종하지 않았지요. 왜냐하면 그것은 내가 가장 사랑했던 돌이었으니까요. 마침내 그 돌을 치우겠다고 결심하자 그분은 나를 도와주시더군요.
만약에 내가 또다시 담을 쌓기 원했다면 아직도 남아있는 것들이 있기 때문에 얼마든지 쌓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그분에게 그 돌들을 아주 멀리 치워달라고 부탁드렸습니다. 그러자 그분은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이 돌을 한쪽 구석에 그냥 내버려두는 것은 너의 의지를 시험하기 위한 것이란다.' 사실 그 돌들이 얼마나 나를 유혹했는지 모릅니다.
그 큰 돌덩어리는 완전히 뽑혀졌지만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부스러기 돌들과 아직 담 속에 남아있는 돌들때문에 나에게 접근해오던 사람들은 계속 넘어지곤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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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질투라는 이름의 돌인데 반드시 치워버려야만 한단다!'
어떤 때는 그 돌을 치우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며칠 동안은 순종하지 않았지요. 왜냐하면 그것은 내가 가장 사랑했던 돌이었으니까요. 마침내 그 돌을 치우겠다고 결심하자 그분은 나를 도와주시더군요.
만약에 내가 또다시 담을 쌓기 원했다면 아직도 남아있는 것들이 있기 때문에 얼마든지 쌓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그분에게 그 돌들을 아주 멀리 치워달라고 부탁드렸습니다. 그러자 그분은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이 돌을 한쪽 구석에 그냥 내버려두는 것은 너의 의지를 시험하기 위한 것이란다.' 사실 그 돌들이 얼마나 나를 유혹했는지 모릅니다.
그 큰 돌덩어리는 완전히 뽑혀졌지만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부스러기 돌들과 아직 담 속에 남아있는 돌들때문에 나에게 접근해오던 사람들은 계속 넘어지곤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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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이전에 읽었던 ‘내 마음 그리스도의 집’과 비슷한 느낌을 많이 준다. 그 당시 내가 하나님과의 관계에 초점을 맞추고 그에 대한 어려움을 토로했던 것과 달리 지금 이 책을 통해서는 사람들과의 관계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었다.
어떤 책인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 책에서 사람들 사이에는 일정한 '거리'가 필요하다고 했다. 그래서 그 거리 안에 들어오려고 하면 사람들은 불편함을 느끼고 따라서 우리가 다른사람의 그 공간을 존중해주고 일정한 거리를 유지해야함을 주장했다. 미국의 경우를 보면, 그 나라만큼 정신과가 보편화된 나라는 없을 것이다. 그들은 친한 친구, 부모, 와이프에게도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며, 따라서 고민, 문제 들은 모두 ‘신뢰’할 수 있고 ‘비밀’이 보장되는 정신과로 가지고 간다. 우리나라도 아직은 미미하지만 그러한 조짐이 보인다. 그러한 면에서 교회 공동체가 서로간의 문제를 오픈할 수 있는 그래서 치유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면에서 감사하게 생각한다.
나는 일과 ‘나’ 우선적인 사람이다. 직장에서든 일상생활에서든 내가 계획한 바, 스케줄대로 되지 않을 때 나는 계획을 우선시하고 사람을 배제하는 경우를 최근 확연히 발견하면서 목표를 이루기 위해 그에 따른 희생은 어쩔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나를 보았다. 이 안에서 생기는 다른 문제는 나의 스케줄 안에서 여유가 있을 때 그들에게 먼저 다가가 도와주겠다고 요청하면서 나름대로 ‘이것 좀 봐. 내가 먼저 도움을 주려고 적극적으로 행동하잖아’하면서 자기만족(혹은 나 자신이 정말 선한 사람인줄 착각)을 하는 점이다. 성경적인 관점은 철저히 사람 중심이다. 심지어 형제와 싸운 경우가 있을 때에는 그것을 먼저 해결하고 예배를 오라고 한다. 심히 일과 성과중심인 세상에서 요구하는 것과 반대된다. 그리스도인에게 요구되는 것은 세상에서 요구되는 그러한 일 이외에 관계까지 중시되니 남들보다 1.3 ~ 2배의 노력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어떠한 공동체이든 관계 자체가 목적이 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목적을 이루기 위한 요소인 관계가, 관계로 인해 일의 성패가 갈릴 수 있을 만큼 지대한 영향력을 행사한다. 나는 직장과 여러 활동들에 의해 사람들을 만나고 공동체에 속해 있다. 시작하는 단계에 있는 것도 몇 개월, 몇 년이 된 것도 있다. 그 중에 나는 교회 공동체 내의 여러 그룹의 관계들에 대해 회의감 또는 괴리를 느낀다. 그것들은 단기간인 경우가 많으며 따라서 그 기간 동안 언제나 나이스한 모습만 보이다가 목적이 달성되면 다시 흩어진다. 운 좋게도 거기서 몇몇을 건질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은 그저 아는 사람이 좀 더 늘어나는 것으로 끝이 난다. 따라서 나는 그러한 관계로부터 경험한 바, 피상적이란 생각도 들고 그래서 가끔은 소모적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나 자신이 능동적이 되지는 않는다. 주어진 것에 최선을 다하겠지만 어차피 흩어질 것이라 생각을 하면서 기대를 하지 않고 따라서 모임자체가 부담이 될 때도 있다. 또한, 교회 공동체는 참 나이스한 사람들의 집합체이다. 직장에서 생활에서 끊임없이 불평불만하고 더 좋은 것을 차지하기위해 노력하던 내가 그들을 만날 때, 깨끗해 보이는 그들로 인해 더러운 내 모습이 비춰지고 반추하게 되기 때문에 거리를 두는 이유도 있다. 즉 그로 인해 나 자신이 포장을 하거나 다가오지 못하도록 일정한 거리를 유지한다.
내 안의 질시, 교만 등 추악함을 가려주는 그러한 투명한 벽에 대해, 나와 같이 투명한 벽을 가진 사람들은 그 역시/나 역시 서로에게 안전함을 느낄 것이며, 더 깊이 본질적으로 들어오고 싶어하는 사람에게는 벽이 되어 부딪치고 상처 입을 것이다. 사람들과의 관계를 쌓기 위해 대체 허물어야하는 것이 얼마나 많은가. 즉 내가 괴로워하는 것은 이러한 나의 관계가 나는 문제없이 편히 지내고 있지만 하나님은 그러한 피상적인 모습으로 사람들을 대하기를 원치 않는다는 것이다. 벽을 깨고 안주함을 버리고 내가 상처받을 것 같은 그 순간으로 앞으로 나아가길 원하시는 것이다. 지금으로서는 먼저 인식하기를 바라며 하나하나 깨뜨려 나가야 할 것이다.
내가 무슨말을 하는지 참 정리가 잘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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