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속에서]
인간이 죄를 범한후, 결국 실패를 경험하였고, 그 같은 경험을 하면서 아무생각없이 살고 싶어하고 의도적으로 포기하고 귀찮아 하는 기본적인 성품이 만들어진 것입니다.
기도하지만 기도하지 않는다 : 표면적으로는 괜찮아 보입니다. 그러나 생각속의 기도로 머물거나 절박감이 떨어진 형식의 기도를 한다는 점입니다. 소위 가벼운 제2상한의 기도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분명 마음에는 중요하다고 느끼지만 전혀 중요하지 않은 삶의 태도를 가진 기도 말입니다.
기도의 부담감 : 주님은 우리의 기도를 통하여 일하시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즉, 우리가 기도하지 않으면 그 일은 이루어지지 않을 수도 있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기도하지 않으면 지금 죽어가고 있는 아무개가 죽는다'라고 생각해 보십시오.
쉬지 못하게 하라 : 단 한 사람의 기도로도 세상이 구원받을 가능성이 있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가장 큰 이유는 우리가 멸망되지 않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단 한 사람이라도 하나님을 헤아리는 진정한 사람이 존재하기만 한다면 그분은 계획을 계속 진행시키고 싶으신 것입니다. 아주 희미한 가능성만 가지고서라도 주님은 일하고 싶으신 것입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만족스럽지 않을지라도, 쉽게 말해 당장 그일이 이루어지지 않을지라도 그것은 씨앗을 말하기 때문이고 희망을 말하기 때문입니다. 기도는 하지만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지도 못한 채 오직 자신을 위해서만 기도하는 매우 이기적으로 자신 안에 갇혀 있는 사람만이 고작 존재하는 시대가 종말입니다. 하나님의 계획은 안중에도 없고 오직 자신만이 존재하는 시대 말입니다.
그렇다면 기도하지 않을 때에는 어떤 일이 벌어지는 것입니까? 하나님이 계획을 세우셨지만 이스라엘이 기도하지 않으면 결코 실행하지 않으십니다.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래도 이스라엘 족속이 이와 같이 자기들에게 이루어 주기를 내게 구하여야 할지라.' 겔 36:37
사막경험 : 내가 하나님에게로 더욱 가까이 가는 것을 타락한 영성을 가진 내가 싫어하기 때문입니다. 적당히 믿고 가는 것은 받아들이지만 완전히 100% 하나님의 소유가 되는 것을 나 자신이 완전히 동의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아직도 내 안에 있는 죄의 권세가 자신의 통치를 빼앗기고 싶지않은 것입니다. 가만히 있어도 흘러나오는 것이 죄입니다.
바보의 벽 : 임신과 출산에 대한 비디오를 보여줬는데 남학생들은 별로 새로운 것이 없었다는 반응을 보였습니다. 실제로 그들이 정말로 다 알기 때문이 아니라 자신과 관계가 적은 정보였기 때문에 자신이 알고 싶어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스스로 정보를 차단하고 자신이 알고 싶어하는 것만을 바라보려 하기에 벌어진 현상이었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의 관심 밖에 있는 것이나 자신에게 불리한 경우에는 아예 하나님의 적극적인 음성조차도 들으려고 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느낌 기도의 위험성 : 우리는 기도보다 느낌이라는 강한적을 만나게 됩니다. 우리의 느낌과 상관없이 기도는 응답된다는 사실입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우리는 이미 응답된 기도를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 기도란 우리가 구하기 때문에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이미 우리를 위해 준비해 놓으신 것을 구하는 것이고 이제는 그것을 누리고 사용하는 것만 남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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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기도의 습관화
나는 기도를 가장 어려워한다. 따라서 나에게는 먼저 기도를 위한 시간 할당과 장소 세팅을 강제적으로 할 필요성이 있다. 규칙적인 기도를 위해서는 새벽녘이 적절한 타이밍이다. 그러나 하루의 시작을 역시 QT로 시작하고 싶어하는 마음과 학원수강으로 인해 새벽은 기도할 수 있는 시간이 내게 그리 많지 않다. 그래서 나는 주로 자기 전 1시간 30분 전을 기도시간으로 세팅하는데, 저녁 시간의 약속과 하루생활의 정리, 미흡한 일에 대한 처리 등으로 인해 종종 계획된 시간보다 늦어지거나 규칙적으로 되어 지기 어려운 부분이 있다. 때로는 이러한 일정으로 인해 잠을 잘 수 있는 시간이 줄어들면서 다음날의 일정에도 영향을 미치게 되는 단점이 있다. 어쨌든 지금은 이러한 trial & error를 반복해가면서 기도와 QT의 가장 적절한 시간을 찾아가는 중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중요한 점은 비록 어떠한 일이 발생하더라도 기도 시간 또는 경건의 시간 총량제를 지켜나가는 것이다. 즉, 기도시간을 30분이라고 했으면, 내가 비록 육체적으로 힘들고 정신적으로 공황상태에 빠져 자기자신의 연민에 빠져 기도하고 싶지 않을 때라도, 기도 5분 + 찬양 10분 + 말씀 15분 =30분 등 이런식으로 경건의 시간, 즉 총량을 강제적으로 채워넣어야겠다는 결심을 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기도는 극제1상한에 해당되는 것으로 나도 무슨 일이 있더라도 엘리야처럼 내 하루하루의 삶에서 가장 최우선순위에 놓아야겠다는 결심을 해본다.
(2) 기도의 내용 & 하나님의 뜻 & 듣기
나의 삶의 태도는 요로 다케시가 말한바대로 '바보의 벽'에 갇혀 있던 경우가 많음을 본다. 모든 것은 '나' 또는 '내 일' 중심이라서 그 밖에는 관심이 없고 들으려고도 하지 않는 경우가 많고 그것이 시간낭비를 줄이고, 내가 필요한 정보만 얻을 수 있기 때문에 오히려 효율적이라고 생각하기도 하였다. 일예로 쇼핑을 가더라도 내가 필요한 것 그것만 보고, 그것만 사는 것이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내가 원하는 목적에 빠르고 효율적으로 도달할 수는 있지만, 주변을 관심을 가지고 돌아볼 때, 비록 당시에는 쓸모없어 보일지라도 얻을 수 있는 것을 놓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여유 및 관심이 향후에 우연찮게 도움을 주거나 또는 인간관계에 있어서는 윤활유 같은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내 나름으로는 효율성이라고 생각하는 이러한 태도가 기도에도 고스란히 반영된다. 내가 원하는 것만 줄줄이 외우듯이 말하고, 생각하고, 간구하면서 내가 할일은 끝냈다는 생각을 하며, 하나님의 뜻이 무엇일지 또는 하나님이 말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일지는 전혀 관심을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이다. '하나님 뜻 안에서 무엇이든지 원하는대로 구하면 다 이루리라'하셨다. 하나님의 나에 대한 뜻은 무엇일까. 이것은 내가 기도를 하고 그 기도에 대한 응답에서 뜻의 유무를 알 수 있다고 해석해도 될까? 이루어지지 않으면 그것은 나에 대해 가지고 계신 하나님의 뜻이 아니기 때문이라고 해석해도 될까.
(3) 응답에 대한 확신
반드시 응답을 주신다고 하셨다. 기도하지 않으면 선물은 그대로 포장된 채 있을 것이다라고 하신다. 이미 구할 것을 예비해 두셨다고 하시지만 그래도 이루어지기를 구하라고 하셨다. 이전에 응답에 대해 불확실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하나님의 상기 말씀으로 인해 이제는 반드시 응답해 주시리란 것을 믿는 믿음으로 기도를 한다. 내가 기도를 할 때 이미 하나님은 기도에 대한 답을 미리 준비해 두셨다. 여기서 잠깐, ‘주리라는 답을 준비해두셨더라면 내가 이 시점에서 노력을 하지 않지만 기도를 열심히 하면 나에게 주어지는가’ 하는 의문이 든다. 그것은 아닐 것이다. 내가 기도하는 그 시점에 그리고 내가 기도를 통한 행위를 함으로써 미래의 답은 즉각즉각 바뀔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를테면 대학원에 대해 하나님은 예스라는 답을 준비해두셨다. 그러나 내가 기도를 했으니 되었겠지 하면서 원서를 대충해서 내면, 아무리 하나님이 주리라고 하셨지만 어떻게 줄 수 있겠는가? 그렇다면 그것은 순전히 내 노력으로만 예스라는 결과를 얻게 된 것 아니냐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시점에서 내가 봐야하는 것은 결과가 아니라 과정에 있다. 내가 예스라는 응답을 받을 수 있도록, 준비하는 과정 중에 인간적인 욕심, 편함을 이기고 순전히 대학원에 준비할 수 있도록 인도해 주신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응답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4) 중보 기도 & 기도의 동역자
최근에 노아의 순종에 따른 그의 가족들까지로의 구원에 대한 QT를 하였다. 물론, 노아 입장 또는 그 가족입장에서는 감사한 일이지만, 타인의 입장에서는 노아는 의인이라 이해하지만 그로 인하여, 그들 눈에는 그들과 별반 다를 것 없는, 똑같이 죄를 저지르고 사는 자식들까지 구원을 받는다는 것은 불공평하게 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이것은 결국 비기독교인들이 '예수만 믿으면 아무리 나쁜 짓 해도 천당가고 예수 안 믿으면 아무리 착한사람이라도 지옥가냐'라고 논쟁을 일으키는 것과 같은 얘기다. 이에 대한 나의 해석은 다음과 같았다. '어차피 하나님 눈에는 이 인간이나 저 인간이나 죄는 오십보 백보이다. 그러나 A라는 사람에게는 그를 위해 중보해주는, 하나님 눈에 어여쁜 의인이 함께 한다. 의인 때문에/예수님 때문에 A를 봐주는 것이다.‘ 이것은 '타인'의 입장에서 봤을 때 불공평하게 보이는 것에 대한 나름대로의 해석이다. 이제는 내가 노아 같은 입장이라면 어떠할까? 라고 생각해보았다. 나로 인해, 단지 나 한사람의 기도로 인해, 내 가족을 포함한, 이 땅에서 고통받고 있는 사람들이 긍휼을 얻는다면, 나의 기도로 인해 하나님께서 계획을 바꾸신다면 얼마나 멋진 일이며 감격스러운 일이며 영광스러운 일일까를 생각해보면, 나는 당연히 내 가족을 위해 내 땅을 위해 응답하실, 행하실 그분을 믿고 기도해야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기도를 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함을 느끼며, 그의 나에 대한 뜻이 무엇일까, 그리고 이 땅에 대한 뜻이 무엇일까를 생각해보고 찾아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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