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이지

2009년 5월 15일 금요일

구원이란 무엇인가 - 김세윤

[책속에서]
[믿음은 하나님의 자원으로 살아가는 삶의 실재]
하나님에 대한 순종 없이 하나님을 의존하는 것이 가능합니까? 하나님께 의존한다고 주장하면서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는다면 그것이 하나님께 대한 의존입니까? 자기가 스스로 상상해 낸 것을 자기가 믿기 때문에 결국 자기를 믿는 것입니다. 전지하시고 사랑이 완전하신 하나님은 이 길로 가는 것이 생명의 길이라고 하는데, 나는 자꾸 저 길로 가야 내게 좋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나에게 축복해달라고 하나님께 새벽 기도도 드리고 철야 기도도 열심히 합니다. '하나님도 내가 이용할 수 있다, 내가 열심히 기도하면 하나님도 꼼짝 못하게 할 수 있다'는 식의 생각, 바로 이것이 내 꾀의 절정입니다. 이것이 가장 큰 교만이요. 하나님과 가장 크게 분리된 상태입니다. 결국 순종이 없는 믿음, 윤리가 포함되지 않은 믿음, 이것이 곧 미신입니다.
[예정교리]
예정교리는 성경대로 믿음의 현재라는 시점에서 내가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구원의 계시를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구원에 대한 확신을 가진 현재에서 되돌아보아야 합니다. 이렇게 주님을 믿는 자가 되어 그리고 현재 나의 믿음에 대해 생각해 봤을 떄, '아! 분명히 내가 믿기 전에 내가 알지도 못하는 사이 성령께서 내게 임사셔서 그의 은혜로 나의 보지 못하는 영적인 눈을 뜨게 하시고, 나로 하여금 십자가에 달린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하게 하고, 그가 나의 죄를 위해 돌아가셨다는 것을 받아들이게 하고, 나의 강퍅한 의지를 꺽어 그에게 순종하게 했구나'하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곧 내가 믿는 순간에는 그 복음을 받아들이겠다고 내가 결단한 듯했으나 믿는 자가 되고 보니 나로 하여금 믿도록 성령께서 미리 역사하셨구나 하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니까 믿음 자체가 선물입니다. 하나님이 내가 알기도 전에 내 안에 역사하셔서 나로 하여금 복음 들을 기회를 주실 뿐 아니라 그 복음을 깨달을 수 있도록 내 속에 미리 역사하셨다면 하나님이 나를 구원하려는 의지가 있으셨구나하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이 나를 구원하시려고 예정하셨음을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의 구원과 계획, 그분의 예정에 의해 내가 전적으로 은혜로 말미암아 구원받았다는 예정의 교리가 없으면 믿음이 내가 하는 자유의지의 결단에 의해 생기고 구원이 내 믿음에 달려 있게 됩니다. 부모님이 교통 사고를 당하거나 해서 삶이 극심한 고난 가운에 처하면 '왜 이러나, 하나님이 안계신가 보다'하고 믿음이 바닥나기 일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구원이 인간의 믿음에 달려 있다면 우리의 구원은 얼마나 불안합니까?
[부록 : 예수는 어떤 메시아인가]
출애굽 : 모세가 광야에서 기적적으로 만나를 먹임유월절 : 예수께서 광야에서 오천명을 먹이심 유대인들은 '이 예수가 진짜 제2의 출애굽의 구원을 이루겠구나! 로마 압박자들을 몰아내고 제2의 출애굽의 구원, 자유와 풍요와 정의의 샬롬을 이룰 구원자가 왔구나!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를 메시아로 추대하고 왕으로 삼으려고 했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부응하지 않고 도망가셨습니다. 유대인들은 밤새 예수님을 뒤쫓아 다녔습니다. 바로 이 사건에서 그들의 메시아적 갈망, 정치적 자유와 경제적 풍요와 사회적 정의를 가져오는 메시아에 대한 그들의 갈망이 절실히 나타납니다. 유대인들은(이 세상 사람들의 대표로서) 항상 물리적인 혹은 이 세상적인 또는 육신적인 관점에서만 생각합니다. 메시아는 제2의 출애굽의 구원을 이룰 자로 기대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메시아는 제2의 다윗으로서든 제2의 모세로서든 정치적 자유, 경제적 풍요, 사회적 정의 등을 가져오는 자로 이해된 것입니다. 이 유대교적 관점에서 예수를 봤을 때, 예수가 메시아로 보였겠습니까? 그러기는 커녕 도리어 스스로 무참히 처형되었을 뿐 아니라 그를 따르는 사람들로 하여금 고난만 받게 하고 쫓기며 죽임을 당하게 하지 않았습니까? 보수적 그리스도인들도 신학적인 논리로는 구원을 영혼의 영역에 한정하려고 주장하지만, 실제의 삶에 있어서는 그리스도가 그들에게 육체적 건강, 사업에서의 성공, 시험 합격등과 같은 이런 세상적 가치들을 가져다 주기를 간절히 비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들도 내세에서의 영혼 구원은 관념의 세계에 묶어 둔 채, 실제로는 해방 신학자들같이 그리스도의 구원을 이 세상적 가치들에만 축약시키는 경우가 많습니다.
========================================================================================
1. 우리가 구원받아야 할 이유
땅에서 뽑힌 풀 한포기를 보면, 무한한 영양공급을 주는 자원, 땅, 물 등으로부터 분리된 상태이다. 광합성의 요소가 되었던 햇빛은 타는 듯한 갈증을 일으키며 시들게 하는 촉진제가 되고, 영양분 공급원은 차단되어 그 안에 내재되어 있는 양분으로만 버티다 결국은 시들고 병들어 죽고 마는 것이 운명이다. 뽑혀진 풀포기처럼, 우리 인생은 아등바등 살거나 또는 그러한 상태에서 스스로를 구원하려하지만 자원의 한계로 인해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다.

내가 구원받아야 할 이유가 무엇일까. 비단 나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사람들이 구원받아야할 필요성을 못 느끼지 않을까. 즉, 이 책에서는 위와 같은 비유를 들어 우리의 삶을 한탄하지만, 아쉽게도 뽑혀진 풀 한포기인 나는 그러한 상태인지를 모른 채 바람에 이리저리 날리며, 그리고 주변의 숱한 풀포기들과 같이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다. 바빠서일까 아니면 생각없이 다수를 따라가는 것이 편해서일까. 우리의 생활을 들여다보면, 개인의 일생에서는 학생→대학→취업→결혼,자녀→노년의 절차를 숨 가쁘게 거치고 사회적/환경적으로는 봄여름가을겨울의 구분 없이 밤낮없이 생존경쟁이 더 치열해지는 사회에서 살고 있다. 이렇게 살다 가끔 내세에 대한 불안이 있으나 또다시 바쁜 일상 속으로 파묻혀버리게 되거나 답이 없는 어려운 문제라고 회피하는 것이 나의 삶이다. 이런 구조를 보면 구원이니 내세니 생각지 못하도록 일부러 이렇게 만들어 놓은 것처럼 삶이 아귀가 잘 짜여져 있는 것 같다.

그래서 실제의 삶에 있어서 구원, 즉 육체적 건강, 사업에서의 성공, 시험 합격 등과 같은 이런 세상적 가치들을 준다고 하는 ‘복을 주는 하나님’에 혹하는 것이다. 사실, 대부분의 교회들이 하나님을 믿게 되면 일이 잘 풀리고 복이 있다는 얘기로 사람들을 처음에 꾀지 않나? 또한, 간증하는 사람들도 보면, 고난 끝에 복이 있다는 얘기들을 하고 있지 않은가. 유대인들처럼, 구원을 통해 현세에서의 삶의 경제적, 정신적 풍요로움을 바라는 것이다.

복을 바라며, 또는 내 안의 허무함을 채우기 위해 등등의 이유로 구원을 간절히 바란다고 하자. 경제적 풍요, 사회적 명예 등과 같은 가치들은 굳이 하나님, 예수님으로부터가 아니라도 사람이 열심히 노력하면 세상으로부터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해서 육체적으로 영생을 하는 것도 아니다. 구원은 죄로 인해 영영 죽을 나를 해방시켜주는 것이다. 즉, 구원은 내세에 나를 살리는 것이고 현세에 적용한다면 죄로부터 자유하게 살아가도록 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죄가 왜 그리 나쁜지, 죄의 삯은 사망이란 뼈저린 인식, 내세에 대한 소망이 필요하다.

2. 사람은 스스로를 구원할 수 있는가?
3. 예수의 삶과 죽음과 부활은 구원의 사건이다
4. 예수의 구속적 죽음에 대한 해석의 성경적 범주들
5. 하나님의 구원과 주관적 적용

성경에서도 말씀한바와 같이(로 7:23, but I see another law(A) at work in the members of my body, waging war against the law of my mind(B) and making me a prisoner of the law of sin(C) at work within my members. => A가 C를 발화) 기본적으로 악한 본성을 가지고 있는 나는 죄의 법을 만났을 때 오히려 촉진되어 결국 죄의 노예가 된다. 즉, 오로지 나로만 채워진 내 자신으로서는(유한자원 = 악한 본성 + 내 마음의 법(양심?, 나약함) + 죄의 법) 스스로 구원을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예수님을 믿음으로써, 그의 영이 내 안에 함께 거함으로써(‘나’라는 유한자원 + ‘영’의 무한자원 투입), 죄의 법에 대항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삶과 죽음이 나에게 어떻게 적용이 되는가? 죄의 삯은 사망이며, 죽을 수 밖에 없는 나 대신 예수님이 나의 죄를 위하여 죽음으로서 나는 ‘죄의 형벌’로부터 자유로워졌다. 또한 그러한 예수님을 믿음으로써 나의 안에 성령을 보내주심으로서 나는 죄에 대항할 파워를 가지게 되었으며, 하나님에 대한 새로운 관계, 의인됨(justification), 화해(reconciliation), 하나님의 아들됨(adoption), 새로운 피조물(new creation)을 정립하게 된다고 한다.

이전보다는 좀 더 구원에 대해 이해하게 되었지만, 관념으로만 제한되며 나의 생활로 드러나지 않는다. 나는 이해를 못해서인가(지성). 감정이 메말라서인가(감정적으로 심히 무디긴 하다, 감정). 믿음이 부족해서인가(믿음). 현세에, 바로 목 전에 벌어진 사건들에 바쁘게 메여 살기 때문인가(바쁨), 현세적인 가치들을 중요하게 여기기 때문인가(탐심). 사람들은 어떻게 예수님의 죽음이, 자신의 죄를 대신한 죽음이란 것에 깊이 공감하고 예수님, 하나님의 은혜에 눈물을 흘리는 것일까?

6. 구원의 종말론적 구조
7. 예정과 지키심

이처럼 구원이 인간의 나의 믿음에 달려있다면 구원은 얼마나 불완전하고 불안한가. 그래서 예정교리가 있어서 나에겐 다행이다. 그러나 예정교리가 “하나님의 뜻을 지켜 순종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확신을 가지도록”하는 것을 주요 내용으로 하더라도 여전히 “그의 의로운 판단에 따라서 악과 함께 강팍케 됨으로 내버려두는 사람들”, 즉 내 가족, 친구가 될 수 있는 그들은 어떻게 될까하는 의문은 남는다(결정론적 사고방식). 그러나 결정론이 아니라 예정론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은 변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따라서 우리가 어차피 예정된 사람들은 택할 것이고 아닌 사람은 아닐 것이라고 단순히 생각함으로써 우리자신 또는 이웃에 대해 손을 놓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환경, 마음을 변화시켜주도록 하나님의 뜻을 바꾸어 주십사 우리는 노력해야하는 것으로 보인다.
또 다른 극단으로 빠지는 것이 알마니안주의로 구원은 사람의 믿는다는 자유의지 행사, 믿는 행위가 조건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즉, 자신의 노력으로 인해 구원받을 수 있다는 것을 강조한다. 이러한 경우의 위험은 내 자신의 믿음이 연약할 때, 많이 넘어질 때 ‘이런 내가 어떻게 하나님의 자식이냐’는 생각을 가지고 결국 하나님과의 관계를 피하고 구원까지 의심하게 되는 경우를 초래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구원을 결정론으로 바라보는 경우, 나의 내면에 어차피 결정된 것, 따라서 노력하지 않으려는 속셈이 있으며, 알마니우스적 신앙의 내면에는 하나님이 아니라 ‘나’를 우선하는 경우가 있다. 이러한 면들은 모두 나의 편의 또는 ‘나’ 중심이라는 욕구를 만족시키는 면이 있다.
따라서 예정교리는 교리가 제시하려고 하는 것과 같이, 나에게 하나님 자식으로 간택 받음, 하나님을 두려워함으로써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아바,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친근함, 불완전한 나를 채워주는 자신감, 확신을 준다.
이 책 어렵다. 술술 넘어가면서 읽긴 했다. 그러나 내가 읽으며 이해한 것이 이해한 것이 아니었다. 이 때문에 예정교리, 구원 등에 대해 찾아보고 다시 생각해보게 되었다. 개념 정리는 대략 된 것 같지만 아직은 그것이 내 관념의 틀에 묶여 있다. 내 나름대로의 받은 생각과 이해들을 두서없이 적은 것이라 해석에 오해가 있을 수도 있으리라 본다.
*****예정교리(구원의 확신을 위한 교리로서)*******************************************************
[일부 출처 : http://www.voice21.com/41th/dogma.htm]
우리는 예정이라는 단어를 흔히 '모든 것이 결정되어 있다'는 의미로 이해하기 쉽다. 그러나 그것은 오히려 '결정론' 또는 '운명론'과 가까운 말이고, 성경에서 말하는 예정은 어떤 역사적 사건들이 이미 정해진 하나님의 계획이나 결정에 따라 발생한다는 것이다.
도르트 회의 결정 문서에서는 "하나님은 택자들의 마음을 은혜로부터 부드럽게 하시고 믿도록 하시며, 그의 택자들이 아닌 자들을 그의 의로운 판단에 따라서 그들의 악과 함께 강퍅케 됨으로 내버려두심"과, "이는 그 선택이 불변의 하나님의 작정임과 하나님의 뜻의 자유롭고 기뻐하심에 따른 것"이라고 쓰고 있다. 예정 교리는 구원의 사역에 있어서 결코 인간이 중심이 되거나 그에게 어떤 역할이 주어지는 것이 아닌, 오로지 하나님의 은혜로서만 이루어짐을 명백히 나타내는 교리이다. 그래서 인간으로 하여금 구원받은 기쁨으로 오직 하나님께만 그 감사와 영광을 돌리도록 하게 하신 것이다. 다른 예로 '펠라기우스'나 '알미니우스'적 신앙으로 돌아서 버리는 것인데, 이들의 특징은 열심과 노력, 의지에 따르는 신앙, 즉 신앙의 근거를 자기 자신에게 두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 중심의 신앙이 아닌 자기 중심적 신앙이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3장 8항에는 다음과 같이 예정론의 유익(有益)을 소개하고 있다. "지극히 신비로운 예정의 교리는 특별히 지혜롭고 조심스럽게 다루어져야 한다. 예정의 목적은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뜻을 지켜 순종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그 자신들이 효과적으로 부름을 받은 사실과 영생 얻은 줄을 확신케 하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이 교리는 하나님께 찬송과 경외와 존귀를 돌리게 되며, 진실히 복음에 순종하는 자들은 이 교리로 말미암아 겸손해지고 근면해지고 풍성한 위로를 받게 된다."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