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내용과 의견]
[1. 결혼은 연합이다]
성경은 정서적 필요를 채우는 방법을 찾는 참고서 신세가 되었습니다. [서문]
그리스도가 나를 안전하게 하셨고 중요하게 하셨습니다. 내가 느끼든 느끼지 못하든 그것은 사실입니다. 남편은 자신의 필요가 이미 채워졌다는 사실을 더 이상 믿지 않습니다. 아내를 제대로 대할 수 있으려면 아내 쪽에서 먼저 남편의 안전감과 중요감을 채워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아내가 먼저 채워 주기를 기다립니다. 그 후에야 아내에게 자신을 내주겠다는 것입니다. 아내가 그를 채워 주지 못하면 아예 뒤로 물러나거나 혹 아내를 공격할지도 모릅니다.
[2. 영적연합]
=>내가 낭떠러지에서 몸을 던지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을 믿지 못해서인가? 너무 두렵기 때문일까? 그러나, 내가 떨어지려고 결심하고 한 발 내딛을 때만 하나님이 존재하심을, 하나님이 나를 잡아주심을 알 수 있는 것이다라고 한다. 나의 속마음을 내비쳤을 때, 사람에게 거부당할 두려움, 비난에 대한 낮은 자존감, 등 상처받을 수 있기 때문에, 그것이 너무나 어렵기 때문에, 늘 생각만 하고 한 발 앞으로 가지 못하는 것이다. 차라리 객체를 바라보듯 한 발 물러서 있는 것이 안전하고, 거짓된 평안일지라도 편안하지 않은가. 이것은 물론 사람과의 관계에서 진실된 연합에서 오는 기쁨을 누릴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렇게 살아왔고 진실된 연합에서 오는 기쁨을 경험해보지 않았기 때문에 기대감이 없다. 무언가 잘 알지도 못하는 것에 몸을 던져 상처받고(상처 받을 것이라고 미리 단정한다) 싶지는 않은 것이다. 그러나, 주님이 ‘그 영원하신 팔이 네 아래 있도다’(신 33:27)라고 말씀하셨다. 나는 현재 알지 못하나 그의 명령을 순종해 보려 한다. 그것으로 인해 내가 상처를 받든, 기쁨을 받든지, 아무것도 안하고 거짓된 평안에서 살아가는 것 보다는 나으리라 생각된다.
[3. 정신적 연합]
(상황1) : 아이들이 제 방으러 자러 간 후 남편이 아내의 허벅지에 팔을 두르며 말합니다. "여보, 당신 정말 멋있어요. 사랑해요."
인간의 마음은 미혹에 얽혀 있어 초자연적 도움 없이는 바른 목표를 정확히 찾아낼 수 없습니다. 자기가 원하는 반응을 얻고자 아내를 조작하는 것이 그의 목표입니다. 사랑받고 존중받기 원하는 아내의 필요에는 거의 관심도 없거나 기껏해야 부차적 관심만 있을 뿐입니다. 즉, 일차적 동기가 자신의 욕구 충족을 위해 상대의 응낙을 얻어내려는 데 있다면 그것은 사랑의 위반이며 잘못된 것입니다. 사랑의 본질은 일차적 관심을 상대의 필요에 두는 것입니다.
목표가 타인을 변화시키는 데 있다면 그것은 잘못입니다. 좋은 변화라도 마찬가지입니다. 상대의 필요를 정확히 알고 그것을 바탕으로 사랑하려는 목표가 없는 한 우리는 섬기는 자가 아니라 조작하는 자입니다.
우리는 감정이란(특히 죄책감이나 비탄같이 무거운 것) 카타르시스를 위해 꼭 표출돼야 하며 그렇지 않을 경우 심리적 손상이 불가피하다는 말을 자주 듣습니다.
각자 자신의 희망사항을 하나씩 생각하십시요. 그것이 갈망이면 기도하면 되고 목표라면 열심히 일해 이루어야 합니다. 외부의 도움없이 혼자 힘으로 희망사항의 성취 여부를 통제할 수 있는가? 이에 대한 답이 예라면 그것은 갈망이 아니라 정당한 목표입니다. 아니라면 그것은 본인이 책임질 목표가 아닙니다. 기도해야할 갈망입니다. 대체로 분노란 목표가 무너질 때 생긴다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요. 자신의 감정이 무너진 갈망에서 온 것임을 분명히 알고 섬김의 목표를 계속 고수할 때에만 배우자에게 부정적 감정을 표현할 수 있습니다. 목표대로 안됐다고 부정적 감정을 표현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배우자가 방해할 수 있는 목표라면 애초에 잘못된 것입니다.
감정을 거부하는 가장 보편적 방법은 상대가 기분을 표현할 때 듣는 사람이 자신을 방어하거나 변명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느낌에만 초점을 두어 자연히 상대방의 느낌은 놓치고 맙니다.
=>이 책에서 예를 든다. “프레드는 직장에서 긴 하루를 마치고 퇴근한다. 무의식중에 저절로 생겨나는 목표는 아내 조안이 저녁을 차려 놓고 상냥한 인사와 따뜻한 포옹으로 자신을 맞아주는 것이다. 한마디로 아내의 사랑에 찬 응대이다. 그런데 아내가 이런 말로 그를 맞는다고 한다. ’왜 이렇게 늦었어요? 여섯 시에 온다고 하구선. 벌써 일곱시가 다 됐잖아요.‘ 조안은 프레드의 목표를 무너뜨렸다. 여기서 나의 목표는 무엇일까를 생각해봐야 한다. 사랑에 찬 응대는 나 혼자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기도해야할 갈망/희망사항이다. 그의 목표는 아내에게 자신의 필요를 채워 줄 반응을 요구한 ’조작적인 목표‘인 것이다. 즉 목표를 조작에서 섬김으로 바꿔야 하며 이의 실제적 과정에는 ’퇴근할 때 아내는 왜 기분 좋게 맞아 주지 못할까?‘라는 생각을 ’지금 내 목표는 아내가 사랑받는 특별한 여자임을 느끼게 해주는 것이다‘라는 것으로 생각을 바꾸는, 즉 내가 혼자서 할 수 있는 작업이 포함된다. 즉, 그러한 순간 생각해야 할 것은 ’섬김의 목표를 택할 것인가? 하는 것이다.
목표와 갈망 이것이 좀 헤깔린다. 또한, 섬김을 고수할 때만 부정적 감정을 표현할 수 있다는 것도 잘 와닿지 않는다. 그래서 역추적해보기로 했다. 목표의 좌절이 분노라고 했기 때문에 내가 주로 어떠한 일로 화를 참지 못하고 폭발하나를 본다. 대부분이 사람사이의 관계에서 온다. 예를 들어 나는, 일적인 면에서 나를 다른 사람과 공정하게 대해주기를 원한다. 그러나, (내가 생각하기에) 그 사람이 나를 불공정하게 대해줬다고 화를 낸다. 이 책에 따르면, 이것은 내가 혼자 할 수 있는 일이 아니기 때문에 기도해야할 갈망이 된다. 그러나, 부부나 가족 친구가 아니라 일적인 관계에서 이것을 그대로 적용하는것은 안되지 않나? 사실, 나의 필요는 정당한 것이 아닌가? 나는 ‘정의’를 원하는 것이다. 나의 존재감/중요감/안전감, 나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가 아니다. 그러나, 내가 충분히 그 일을 감당할 수 있음에도 불구 왜 저 사람은 노는데 왜 나는 일을 더해야 하는냐란 비교의 생각으로 인해 불공평하다고 외치는 것이 정의인가? 사실, 또한 그리함으로써 일에 대한 자부심, ‘열심히 일한 당신 떠나라’라고 말한 바와 같이 나의 권리를 눈치 안보고 당당히 주장하고 있지 않은가?
직장내에서 섬기는 것은 무엇일까? 누구나 자신만 일이 많다고 불평하고 이것은 자신의 일이 아닌데 왜 해야하느냐고 자신이 자신의 일의 범위를 정해서 스트레스 받고 불만을 표출한다. 이에 대한 해결책은 무엇일까? 내가 누군가에게는 이리 말한적있다. '누가 일이 당신일인지 아닌지 결정하냐고, 왜 그것을 주제넘게 당신이 결정하냐고?' 그러나 웃긴일은 내가 그사람의 입장이 되었을 땐 내가 일의 범위를 정하고 그 일의 범위를 넘어서서 일을 주게되면 불공평하다고 분노를 표출했던 것이다. 크리스챤 메뉴얼 저자가 말한 바와 같이 한없이 주관적이고 자기중심적인 것이다.
[5. 육체적 연합]
인간은 최고의 기쁨과 만족은 오감을 통해 오지 않는다는 진리를 잃어버렸습니다. 그리스도인마저 인격적 고통을 육체적 쾌락으로 떨치려 합니다. 거부나 두려움이나 고독이나 공허감으로 괴로울 때 육체적 감각을 자극하여 괴로움을 피하고 싶은 유혹을 떨치기란 쉽지 않습니다.
부부간의 육체관계에서 다루기 힘든 인격의 요소가 개입되어 있는 경우, 감정을 극복하는 작업이 필요하며, 그만큼 깊은 통찰과 고통이 따릅니다. 사람들이 육체적 연합이라는 좁고 험한 먼 길을 떠나 흥미를 좇는 섹스라는 넓고 편한 지름길을 찾는 한 가지 확실한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나의 필요를 채우기 위해 상대를 조작하려는 목표를 상대의 필요를 채우기 위해 내가 섬긴다는 목표로 과감히 바꾸십시오. 이 변화가 일어날 때 세가지 파괴적 감정은 서서히 사라질 것입니다. 첫째, 섬김의 목표는 배우자로 인해 방해받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배우자에게 분노를 느낄 일이 없습니다. 둘째 섬김의 목표는 본인의 의지에 의해서만 성취 여부가 좌우됩니다. 따라서 상대가 어떻게 나올까하는 불안이 사라집니다. 셋째, 주님 뜻대로 배우자를 대한다는 목표는 도달 가능한 것입니다. 적어도 기본 방향은 고수할 수 있습니다. 누구나 실패할 수 있지만 자백과 용서, 회개와 능력의 자원이 있기에 언제가 다시 시작해 계속 성장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죄책감에 시달릴 이유가 전혀없습니다.
=>문제가 닥쳤을 때의 행동을 보면, 자극적인 음식을 먹고 자는 경우가 있다. 내심으로는 내일이 되면,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지겠지하면서 사실 가만히 있어도 문제가 사라지기를 바라는 것이다. 이것은 바쁘거나 다른 사건이 터짐으로 잊혀진다. 그리고 또 그러한 문제가 반복된다. 그러나 공허함, 나 자신에 대한 실망 등의 문제는 내가 해결할려고 용을 써도 나로서는 해결될 수 있는것이 아니지 않나? '너는 최고다'라는 자기 최면을 걸면되나? 나보다 못한 사람들을 보면서 나의 상황에 위안을 삼아야하나? 이것은 일시적인 효과는 줄 수 있으나 그것도 안먹히는 상황이란 것이다. 이에 대한 답은 한가지 밖에 생각나지 않는다. 하나님께 기도하고 내 문제를 모두 말하고 내가 할 수 없는 부분들에 대해 부디 채워주기를 간구하는 것이다. 지혜있는 사람들이 그리 말하니 지금으로서는 그것을 하는 방법밖에 없다.
[결혼의 기초]
'기분이 들든 말든 아내를 사랑하고 남편에게 복종하라'는 말은 문제의 뿌리에 도끼를 갖다 대지 못합니다. 순종의 기반으로 하나님의 선하심을 바로 알지 못하면 그런 격려는 기껏해야 분노와 불화의 잡초의 번식을 막는 역할밖에 못합니다. 숨은 뿌리덩굴을 찾아 뽑는데는 역부족입니다. 꽃은 있지만 그 꽃은 깨어진 약속이 자란 흉한 결과입니다. 순종의 권면은 중요하고 옳습니다. 그러나 그 권면을 기쁘게 받아들이려면 먼저 하나님의 선하심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우선 순위를 내 행복이 아니라 상대의 행복에 두는 것은 왠지 손해 같습니다.그런 태도로 사는 한 우리는 보상을 조건으로 결혼 서약을 지키는 것입니다. 배우자에게 준 만큼 나한테도 돌아올 때에만 약속을 지킵니다. 결국 보상은 점점 줄어듭니다. 내 행복과 상대의 행복 중 택일해야 하는 순간마다 결혼의 헌신은 마치 자유와 기쁨을 송두리째 앗아가는 감옥처럼 느껴집니다. 자연히 헌신 쪽을 택하면 형기를 치르는 기분을 떨칠 수 없습니다. 배우자에게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아무리 거듭 확인하여 살아도 우리는 계속 상대에게 많은 것을 바랍니다. 친밀함과 감정적 지원과 존경과 인정과 성적 만족과 그 이상의 것들을 원합니다. 이런 갈망이 있기에 상대의 행동이 기대에 어긋나면 기분나쁘고 속상합니다.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면 상대의 어떤 행동도 아픔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배우자에게 바라는 것이 있으며 마땅히 그래야 합니다. 하지만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면 어쩔수없이 불쾌감이 듭니다. 이 상처와 불쾌감이 어떻게 원한으로 악화됩니까? 불쾌한 사건이 일어나자마자 빌은 (대개 무의식중에) 그 사건을 평가합니다. 사건을 자신의 필요와 연결시켜 해석할 수도 있고 갈망과 연결시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자신의 자존감이 아내의 인정에 달려있다고 믿는다면 아내의 못마땅한 행동을 자신의 중요감의 필요에 대한 심각한 위협으로 오판할 것입니다.
'감정을 아내에게 털어놓아야 하는 것 아닙니까?' 라는 질문에, '그것은 감정을 털어놓는 목표에 달려 있습니다. 당신의 모든 일은 한 가지 목표에 부합해야 합니다. 바로 섬김입니다. 아내의 불륜이 생각나 괴롭다고 말하면 그 말을 들은 아내는 분명 죄책감과 좌절이 커질 것입니다. 당시의 진짜 의도는 그렇게 털어놓음으로 아내를 벌하려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용서와 섬김의 결단에는 상한 감정을 다시 말하지 않는것도 포함됩니다. 아내의 불륜이라는 사건에 대해 아내의 과오를 남자로서 자신의 중요감과 연결시키기 때문에 일차 감정 불쾌감이 원한으로 비화됩니다. 그렇다면 원한의 치유책은 재헌신의 노력이 아니라 사고의 교정입니다. 아내의 죄를 자신의 필요에 대한 위협이 아니라, 갈망의 장애물로 보지 않는 한 원한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마음에 배우자의 거슬리는 행동이 떠오를 때마다 다음 사실을 강하게 반복 주장해야 합니다. 어떤 일이 일어나도 그리스도 안에서 나의 안전감과 중요감은 흔들리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상대의 거슬리는 행동이 마음에 되살아날 때마다 '내 필요는 그리스도 안에서 다 채워졌다'는 진리를 즉각 떠올리는 것이 바로 접근의 열쇠입니다.
수용하려면 상대가 상처 줄 때마다 계속 용서해야 합니다. 용서의 작업에는 배우자의 최악의 행동도 내 인격의 기본 필요와는 절대 무관하다는 태도가 필요합니다. 이 진리가 마음속에 확실히 자리잡고 있어야 상대가 기분 상하게 해도 두려움이나 의무감 없이 자원함으로 섬길 수 있습니다
=>베드로가 '일곱번 용서하면 되겠습니까?' 하자 예수님이 '일곱번을 일흔번까지도 하라'고 하신다. 인간적인 생각으로는 내 희생을 이용하는 것 아니냐? 상대방은 맘대로 잘못저지르는데 왜 내가 그를 용서하고 나만 괴로워하고 용서해야하느냐? 라는 생각이 먼저 든다. 그러나, '용서해 봤어? 해보지 않았으면 말을 하지 말어' 라는 요즘 유행하는 말처럼 내가 해보기는 했나라는 생각이 든다. 겨우 한번도 제대로 못하지 않은가. 하면은 하나님이 하늘의 상급을 주신다지 않은가. 좀 믿고 쫌 해보는 시늉이라도 해봐야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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