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 본문은 "나를 지으신 하나님의 놀라운 손길"에서]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곡 물에서 올라오실쌔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 하늘로서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 (마태 4: 16~17)
하나님께서는 각 '세포'에게 한 가지 요구, 즉 각 사람은 머리에 충성하라는 요구만 하고 계시다. 오직 머리되신 분에 대한 충성과 그분을 통해 서로에게 충성하는 것만이 중요한 것이다.
소설가 프레데릭 뷔히너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일을 성취하기 위해 성경 시대에 선택하셨던 잡단한 사람들을 다음과 같이 재미있게 묘사했다. "그 누가 하나님께서 정직하고 신뢰할만한 에서(Esau) 대신 비열한 사기꾼 야곱을 택하고, 술을 즐기는 노아를 선택하며, 애굽에서 사람을 쳐죽이고도 미디안에서 벌을 면하려 했던 모세를 사용하고, 대부분 미치광이나 거지와 같았던 선지자들을 들어 쓰시리라고 예상했겠는가?"
우리의 문화는 어린이가 초등학교에서 점수에 의해 실력 평가받으면서 시작되는 등급 체계로 형성되어 있다. 이런 평가에 신체적 외모, 인기도, 운동능력같은 요인을 결합하여 사람들은 자신의 가치를 헤아린다. 이런 사회에서 생활하다 보니 나의 시야는 흐려진다. 나는 병원 수위가 비행사보다 인간적 가치가 덜한 것처럼 생각하기 시작한다. 이런 상황이 전개될 때, 나는 바울이 끝없는 경쟁과 가치 등급을 배경으로 묘사했던 모의 유추로 되돌아가야만 한다. 인간 사회에서는 수위가 쉽게 대체될 수 있기 때문에 신분이 낮다. 따라서 우리는 그에게 봉급을 적게 주고 그를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몸의 분업 체계는 신분에 기분을 두고 있지 않다. 신분과 수행되는 임무는 비례 관계가 아니다. 몸의 수위(관리인)는 없어서는 안될 만큼 요긴한 존재들이다. 이 말이 믿어지지 않는다면 신장 투석을 위해 일주일에 두번씩 병원을 찾아야 하는 사람을 한번 만나 보라.
"만일 너희 회당에 금가락지를 끼고 아름다운 옷을 입은 사람이 들어오고 또 더러운 옷을 입은 가난한 사람이 들어올 때에 너희가 아름다운 옷을 입은 자를 돌아보아 가로되 여기 좋은 자리에 앉으소서 하고 또 가난한 자에게 이르되 너는 거기 섰든지 내 발등상 아래 앉으라 하면 너희끼리 서로 구별하며 악한 생각으로 판단하는 자가 되는 것이 아니냐"(야고보 2: 2-4)
참 놀라운 일이다. 내가 가장 장점이고 강점이라고 생각되는 부분을 하나님은 먼저 깨뜨리신다. "독립적인 것"을 나는 상당히 좋아하며 강점이라고 얘기한다. 그러나 이러한 부분은 공동 작업을 할때 all or nothing이라는 마인드를 가진 나를 보면서 문제라고 인식하기도 한다. 남에게 부탁을 하면 그만큼 내가 무엇인가를 남에게 해줘야한다는 마음의 빚을 갖게 되어, 되도록 이면 나혼자서 일을 처리하려고 한다. 그러나, 나는 나 혼자 잘나서 일을 한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 안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무수히 많은 다른 사람들의 도움 및 협력을 받고 있음을 알게 된다. 혼자 끙끙댈때, 동료의 농담 한마디, 충고 한마디, 보조해 주는 분들의 노고 등 나 혼자서 하는 일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혼자다했다고 자만심에 빠진 경우가 있다.
세상에는 지방세포 처럼 뚱뚱하기만 하고 쓸모없어 보이는 사람도 존재하고, 백혈구처럼 외모는 비록 둔하지만 문제가 발생 시 누구보다도 먼저 다른 사람들을 돕는 사람도 있고, 온몸의 말초까지 장악하면서 명령을 내리는 신경세포처럼 아주 대단하게 보이는 사람 등등 다양한 사람들이 존재한다. 우리의 몸안에서는 powerful한 근육세포가 더이상 힘을 못 쓸때, 쓸모 없어 보이는 지방세포가 자신의 몸을 태워서 근육세포의 일을 대신해주기도 하며, 이러한 세포중 하나만 잘못되어도 몸 자체가 고통 및 혼란에 빠질 수 있다. 이렇듯 그리스도를 구성하는 개개인들이 중요하다 하지만, 그러나 실제로 나는 하나의 세포일뿐이며, 타세포가 무엇을 하든 내게 무슨 큰 상관이 있을까 싶기도하다. 세포 하나하나가 구성되어 전체를 이루는 그리스도는 대체 "내"가 아니지 않느냔 말이다. 물론 타 그리스도인의 생각, 행동양식 등이 내게 영향을 미칠 수 있고 나또한 그러하리란 것은 알지만, 아직 타인을 위해, 전체를 위해, 내가 해야하는 일은 보이질 않는다.
거대한 현대 기술 문명은 한 인간이 일상 생활을 수행해 나가는 과정에서 다른 사람에게 아무것도 요청할 필요가 없도록 만드는 것을 과업으로 설정한 것처럼 보인다. 우리는 갈수록 더 많은 사생활을 추구하고 있다. 그리고 그것을 얻었을 때 점점 더 소외감과 고독을 느낀다.
(필립 슬레이터)
진실되지 않은 상황이 더 편리하고 상대에게 불쾌감을 주지 않을 때가 있다. 그러나 진리를 추구하는 마음은 조끼처럼 입었다가 벗어 던질 수 있는 것이 아니며 근육처럼 수축되었다가 이완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건강한 뼈처럼 견고하고 신뢰할 만한 것이어야 한다. 그런것이 아니라면 쓸모가 없다.
그리스도인의 생활에서 나는 때때로 불확실성을 내포한 선택을 해야만 할 때가 있다. 만일 내가 모든 증거가 들어오고 모든 것이 안정될 때까지 기다린다면, 나는 일체 움직이지 못할 것이다.
오늘날 복음주의자는 어떻게 인식되고 있는가? 종종 이들은 엄격한 규율을 준수하는 사람들로 인식되기도 한다. 신경 정신과 의사들은 복음주의자는 죄책감을 유발하는 자들이라고 통박하면서 그들의 환자의 반 이상이 교회 안에서 혼란에 빠졌다고 선언하고 있다. 왠일인지 우리는 그리스도인의 여러 가지 변형을 만들어 내고 있는것 같다. 우리는 외골격 속으로 물러나, 우리가 세상 다른사람들과 얼마나 다른가를 보여줌으로써 세상에서 우리의 위치를 규정하려는 성향이 있는 것은 아닌가!
나는 율법주의를 무해한 믿음의 변이로 보고 싶은 유혹을 종종 느낀다. 한 교파에서 죄가 되지 않는 활동을 금지하기로 결정한들 그것이 어떻단 말인가? 교인들이 술, 담배를 허물없이하는 외국 교회들이, 그리스도인이 청바지를 입고 껌을 씹는 것이 무슨 큰 죄라도 되는 것처럼 눈쌀을 찌푸리고 쳐다보는 것은 우습지 않은가? 우리의 문화적 버릇이나 멋 같은 것을 무해한 변이라고 보는 것이 어떠한가?
통계적으로 볼 때, 테레사 수녀가 절망의 구덩이에 빠져있는 인간들 중 단지 몇 명의 걸인들을 구조해 준다고 많은 것을 달성할 수 없다는 것을 안다. “기독교는 인생을 통계학적으로 보는 것은 아니다”라고 결론을 맺는다.
기독교는 인생에 대한 통계학적 관념이 아니다. 한시간 노동을 위해 고용된 일꾼이 하루 종일 땀 흘리며 일한 품꾼과 같은 품삯을 받는것을 생각해 보라(마 20:1-16). 한 악랄한 죄인이 회개했다고 하는 나라가 온통 잔치를 베풀고 기뻐하는데 아흔아홉 명의 의로운 시민들은 사실상 무시를 받고 있는 상황을 생각해 보라(눅 14:4-7)
행동을 삼가는 것도 행동을 감행하는 것 못지않게 하나의 행동이 된다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곡 물에서 올라오실쌔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 하늘로서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 (마태 4: 16~17)
하나님께서는 각 '세포'에게 한 가지 요구, 즉 각 사람은 머리에 충성하라는 요구만 하고 계시다. 오직 머리되신 분에 대한 충성과 그분을 통해 서로에게 충성하는 것만이 중요한 것이다.
소설가 프레데릭 뷔히너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일을 성취하기 위해 성경 시대에 선택하셨던 잡단한 사람들을 다음과 같이 재미있게 묘사했다. "그 누가 하나님께서 정직하고 신뢰할만한 에서(Esau) 대신 비열한 사기꾼 야곱을 택하고, 술을 즐기는 노아를 선택하며, 애굽에서 사람을 쳐죽이고도 미디안에서 벌을 면하려 했던 모세를 사용하고, 대부분 미치광이나 거지와 같았던 선지자들을 들어 쓰시리라고 예상했겠는가?"
우리의 문화는 어린이가 초등학교에서 점수에 의해 실력 평가받으면서 시작되는 등급 체계로 형성되어 있다. 이런 평가에 신체적 외모, 인기도, 운동능력같은 요인을 결합하여 사람들은 자신의 가치를 헤아린다. 이런 사회에서 생활하다 보니 나의 시야는 흐려진다. 나는 병원 수위가 비행사보다 인간적 가치가 덜한 것처럼 생각하기 시작한다. 이런 상황이 전개될 때, 나는 바울이 끝없는 경쟁과 가치 등급을 배경으로 묘사했던 모의 유추로 되돌아가야만 한다. 인간 사회에서는 수위가 쉽게 대체될 수 있기 때문에 신분이 낮다. 따라서 우리는 그에게 봉급을 적게 주고 그를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몸의 분업 체계는 신분에 기분을 두고 있지 않다. 신분과 수행되는 임무는 비례 관계가 아니다. 몸의 수위(관리인)는 없어서는 안될 만큼 요긴한 존재들이다. 이 말이 믿어지지 않는다면 신장 투석을 위해 일주일에 두번씩 병원을 찾아야 하는 사람을 한번 만나 보라.
"만일 너희 회당에 금가락지를 끼고 아름다운 옷을 입은 사람이 들어오고 또 더러운 옷을 입은 가난한 사람이 들어올 때에 너희가 아름다운 옷을 입은 자를 돌아보아 가로되 여기 좋은 자리에 앉으소서 하고 또 가난한 자에게 이르되 너는 거기 섰든지 내 발등상 아래 앉으라 하면 너희끼리 서로 구별하며 악한 생각으로 판단하는 자가 되는 것이 아니냐"(야고보 2: 2-4)
참 놀라운 일이다. 내가 가장 장점이고 강점이라고 생각되는 부분을 하나님은 먼저 깨뜨리신다. "독립적인 것"을 나는 상당히 좋아하며 강점이라고 얘기한다. 그러나 이러한 부분은 공동 작업을 할때 all or nothing이라는 마인드를 가진 나를 보면서 문제라고 인식하기도 한다. 남에게 부탁을 하면 그만큼 내가 무엇인가를 남에게 해줘야한다는 마음의 빚을 갖게 되어, 되도록 이면 나혼자서 일을 처리하려고 한다. 그러나, 나는 나 혼자 잘나서 일을 한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 안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무수히 많은 다른 사람들의 도움 및 협력을 받고 있음을 알게 된다. 혼자 끙끙댈때, 동료의 농담 한마디, 충고 한마디, 보조해 주는 분들의 노고 등 나 혼자서 하는 일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혼자다했다고 자만심에 빠진 경우가 있다.
세상에는 지방세포 처럼 뚱뚱하기만 하고 쓸모없어 보이는 사람도 존재하고, 백혈구처럼 외모는 비록 둔하지만 문제가 발생 시 누구보다도 먼저 다른 사람들을 돕는 사람도 있고, 온몸의 말초까지 장악하면서 명령을 내리는 신경세포처럼 아주 대단하게 보이는 사람 등등 다양한 사람들이 존재한다. 우리의 몸안에서는 powerful한 근육세포가 더이상 힘을 못 쓸때, 쓸모 없어 보이는 지방세포가 자신의 몸을 태워서 근육세포의 일을 대신해주기도 하며, 이러한 세포중 하나만 잘못되어도 몸 자체가 고통 및 혼란에 빠질 수 있다. 이렇듯 그리스도를 구성하는 개개인들이 중요하다 하지만, 그러나 실제로 나는 하나의 세포일뿐이며, 타세포가 무엇을 하든 내게 무슨 큰 상관이 있을까 싶기도하다. 세포 하나하나가 구성되어 전체를 이루는 그리스도는 대체 "내"가 아니지 않느냔 말이다. 물론 타 그리스도인의 생각, 행동양식 등이 내게 영향을 미칠 수 있고 나또한 그러하리란 것은 알지만, 아직 타인을 위해, 전체를 위해, 내가 해야하는 일은 보이질 않는다.
거대한 현대 기술 문명은 한 인간이 일상 생활을 수행해 나가는 과정에서 다른 사람에게 아무것도 요청할 필요가 없도록 만드는 것을 과업으로 설정한 것처럼 보인다. 우리는 갈수록 더 많은 사생활을 추구하고 있다. 그리고 그것을 얻었을 때 점점 더 소외감과 고독을 느낀다.
(필립 슬레이터)
진실되지 않은 상황이 더 편리하고 상대에게 불쾌감을 주지 않을 때가 있다. 그러나 진리를 추구하는 마음은 조끼처럼 입었다가 벗어 던질 수 있는 것이 아니며 근육처럼 수축되었다가 이완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건강한 뼈처럼 견고하고 신뢰할 만한 것이어야 한다. 그런것이 아니라면 쓸모가 없다.
그리스도인의 생활에서 나는 때때로 불확실성을 내포한 선택을 해야만 할 때가 있다. 만일 내가 모든 증거가 들어오고 모든 것이 안정될 때까지 기다린다면, 나는 일체 움직이지 못할 것이다.
오늘날 복음주의자는 어떻게 인식되고 있는가? 종종 이들은 엄격한 규율을 준수하는 사람들로 인식되기도 한다. 신경 정신과 의사들은 복음주의자는 죄책감을 유발하는 자들이라고 통박하면서 그들의 환자의 반 이상이 교회 안에서 혼란에 빠졌다고 선언하고 있다. 왠일인지 우리는 그리스도인의 여러 가지 변형을 만들어 내고 있는것 같다. 우리는 외골격 속으로 물러나, 우리가 세상 다른사람들과 얼마나 다른가를 보여줌으로써 세상에서 우리의 위치를 규정하려는 성향이 있는 것은 아닌가!
나는 율법주의를 무해한 믿음의 변이로 보고 싶은 유혹을 종종 느낀다. 한 교파에서 죄가 되지 않는 활동을 금지하기로 결정한들 그것이 어떻단 말인가? 교인들이 술, 담배를 허물없이하는 외국 교회들이, 그리스도인이 청바지를 입고 껌을 씹는 것이 무슨 큰 죄라도 되는 것처럼 눈쌀을 찌푸리고 쳐다보는 것은 우습지 않은가? 우리의 문화적 버릇이나 멋 같은 것을 무해한 변이라고 보는 것이 어떠한가?
통계적으로 볼 때, 테레사 수녀가 절망의 구덩이에 빠져있는 인간들 중 단지 몇 명의 걸인들을 구조해 준다고 많은 것을 달성할 수 없다는 것을 안다. “기독교는 인생을 통계학적으로 보는 것은 아니다”라고 결론을 맺는다.
기독교는 인생에 대한 통계학적 관념이 아니다. 한시간 노동을 위해 고용된 일꾼이 하루 종일 땀 흘리며 일한 품꾼과 같은 품삯을 받는것을 생각해 보라(마 20:1-16). 한 악랄한 죄인이 회개했다고 하는 나라가 온통 잔치를 베풀고 기뻐하는데 아흔아홉 명의 의로운 시민들은 사실상 무시를 받고 있는 상황을 생각해 보라(눅 14:4-7)
행동을 삼가는 것도 행동을 감행하는 것 못지않게 하나의 행동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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