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속에서]
죄가 그대를 괴롭히는가? 만일 그대가 죽었다면 죄를 지을수 있겠는가? 물론 지을 수 없다. 그런즉 당장 죽으라. 진짜 그리스도인은 누가 좋지 못한 소리를 한다 해서 동요되는 법이 없다. 그는 "세상에 대하여 죽어 있기"때문이다.
예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엘리, 엘리(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하고 소리치셨다. 그런데 십자가 밑에 있던 사람들은 그가 예언자 엘리야의 이름을 부르고 있는 줄로 알았다. 이런 식의 오해는 매일 일어난다.
하나님, 이 세상이 저의 것입니까? 하나님의 것입니까? 이 교회가 당신의 것입니까? 저의 것입니까? 만일 당신의 세상이고 당신의 교회라면 그것들을 돌보십시오! 저는 잠을 자러 갑니다.
육신의 눈만 가지고 보려고 할 때 그것이 오히려 우리로 하여금 궁극적인 실재를 보지 못하게 한다. 예수님은 해, 달, 바람, 구름의 주인이시다. 그분은 있는 모든 것을 전체적으로 다 보신다. 그분은 온전한 진리다. 그분의 진리 만이 죄 때문에 이그러지지 않은 진리이기 때문이다.
기독교인은 그 자신으로서 스스로 이루어야할 목표가 없다. 그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손길에 달려있다. 그러므로 그는 억지로 애를 쓰지 않고도 거룩한 사람이 된다. 억지란 사람이 지나친 열망으로 자제력을 잃을 때 생기는 것이다. 그러나 당신이 거룩하게 되는 것도 실은 당신의 열망이아니다. 하나님이 당신에게품으신 열망이다.당신은 당신이 온 몸에서 힘을 뽑아버림으로써 그것을 얻을 것이다.
"산디에고의 기적"이란 그림,
어떤 노동도 우리가 천하게 만들지 않는 한 천하지 않다. 가장 위대한 사명을 지니셨던 예수님 자신도 목공소에서 일하셨다.
교회의 아름다움은 죄인을 받아들인다는 사실에 있다. 죄인들은 교회에 들어온 뒤에도 이번에는 그리스도교의 외투자락 속에서 새로운 범죄를 저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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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엘리, 엘리(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하고 소리치셨다. 그런데 십자가 밑에 있던 사람들은 그가 예언자 엘리야의 이름을 부르고 있는 줄로 알았다. 이런 식의 오해는 매일 일어난다.
하나님, 이 세상이 저의 것입니까? 하나님의 것입니까? 이 교회가 당신의 것입니까? 저의 것입니까? 만일 당신의 세상이고 당신의 교회라면 그것들을 돌보십시오! 저는 잠을 자러 갑니다.
육신의 눈만 가지고 보려고 할 때 그것이 오히려 우리로 하여금 궁극적인 실재를 보지 못하게 한다. 예수님은 해, 달, 바람, 구름의 주인이시다. 그분은 있는 모든 것을 전체적으로 다 보신다. 그분은 온전한 진리다. 그분의 진리 만이 죄 때문에 이그러지지 않은 진리이기 때문이다.
기독교인은 그 자신으로서 스스로 이루어야할 목표가 없다. 그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손길에 달려있다. 그러므로 그는 억지로 애를 쓰지 않고도 거룩한 사람이 된다. 억지란 사람이 지나친 열망으로 자제력을 잃을 때 생기는 것이다. 그러나 당신이 거룩하게 되는 것도 실은 당신의 열망이아니다. 하나님이 당신에게품으신 열망이다.당신은 당신이 온 몸에서 힘을 뽑아버림으로써 그것을 얻을 것이다.
"산디에고의 기적"이란 그림,
어떤 노동도 우리가 천하게 만들지 않는 한 천하지 않다. 가장 위대한 사명을 지니셨던 예수님 자신도 목공소에서 일하셨다.
교회의 아름다움은 죄인을 받아들인다는 사실에 있다. 죄인들은 교회에 들어온 뒤에도 이번에는 그리스도교의 외투자락 속에서 새로운 범죄를 저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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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려움: born to thinking vs. 바쁨 wandering without thinking or purpose]
어려움 또는 고난이 나쁜 것만은 아니다. 나에게 있어서 좋은 점은 그 어려움으로 인해 내가 치열하게 고민하게 된다는 점이다. 더불어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역할과 책임도 나를 괴롭히면서 올바른 신앙인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는 계기를 준다. 즉, 고민이 있을 때 오히려 나는 내 존재감을 느끼기도 하는 것이다. 이를테면 '이런 핑계를 대면서 일을 살짝 피해볼까'하는 이런저런 잔머리를 굴리는 나를 보며 '또, 육체적 편함을 추구하고 있군, 그러면서 그리스도인이냐'라고 한편에서 주장하고, 다른 한편에서는 '하지만 환경이 주어지면 나는 열심히 하잖아'하면서 자기 합리화를 하는 나를 동시에 본다. 즉, 어려움을 통해 그에 따른 선과 악에 대해 복합적으로 생각하고 대응하는 하나의 인간을 보며 '나' 자신을 인식하고 나를 느낀다. 그러나, 내가 이리저리 바쁘다보면 나는 해야하는 일에 대해서만 생각을 하고 충실히 하지만 '나'에 대한 생각은 점점 없어지고 그래서 때때로 문득 돌아보면 생각은 없고 기계적으로 행동만 하는 내가 보인다. 그래서 불과 일주일 전에도 독후감을 쓰면서 나를 돌아봤을텐데, 지금 다시 독후감을 쓰면서 이렇게 나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을 가지게 된것이 굉장히 오래만인 듯이 느껴진다.
그렇다면 지금 나의 모습은 어떠한가. 연말이라서 그런것인가? 아니면 휴일이 많아서 그런것인가? 그것도 아니면 벌려놓은 일들을 follow up 하는데 바빠서 이리 영적/정신적/신앙적으로 무감각한 상태에 있는 것인가? QT 5번 해야하는 것중에 2번 안했을 뿐이고, 설교노트 등 소소한 것을 게을리 했을뿐인데, 하지만 새벽기도, 제자훈련도 꾸준히 나가는데 왜이리 하나님과 멀게 느껴지는 것일까.
지금, 나는 일에 쫓김을 당하고 있는 상태이다. 알고서 놓치는 것이 아니라, 막상 다가왔을때, 까맣게 잊고 있었다는 것을 자각하며 내가 놓친것을 깨닫는 경우가 있다면, 문제가 있는 상태이다. 나의 '09년 계획과 이번달 계획을 살피면서 이번달만 참으면 된다고 나를 달랠 것인지 아니면 우선순위를 둬서 하위에 있는 것들을 과감히 잘라버려야 할 것인지 결정하려고 한다. 그러나 나는 사실은 100%를 할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부족한 부분에 능력을 달라고 간구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앞서 말한 바와 같이 하위순위에 있는 계획들을 자른다거나 하면서 그저 모든 것을 나 혼자서 알아서 조절하고 처리하고 있다. 그러다보니 피곤과 어려움속에도 이러한 모든 부분들을 잘 감당할 수 있게 해달라고 절실히 피곤에 쪄들어 기도하는 그러한 갈망과 갈급함이 없다. 언젠가 직장 스트레스 때문에 미쳐버릴 것 같다고 말하는 성도에게 목사님이 새벽기도를 나가보라고 권한것을 들은적이 있다. 그 성도는 목사님이 제정신인가, 지금도 바빠 죽을 것 같은데 새벽기도까지 가면 정말 죽을것이라고 생각하며 투덜거렸다고 한다. 그러나, 계속 그 말씀이 마음에 걸려 새벽기도를 나갔더니, 자신은 할 수 없으리라고 생각했는데 오히려 그 모든 것을 다 감당할 수 있는 능력을 주셨다고 말을 한다.
또한, 나는 죄, 그리고 일에 대해서 완벽에 기준을 두는 것이 아니라 어차피 인간은 어떻게 하든 불완전하다라는 기본 전제를 깔고 90% 또는 imperfection에 기준을 둬서 행하고 처리한다. 기준을 둘 중에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나의 행동, 결과는 확연히 차이가 난다. 즉, 나는 죄에 대해서는 더 관대해질것이고 일에 대해서는 최선을 다하지 않게 된다.
결론을 내리면, 일에 대해 쫓김을 당하고 있다고 느낀다면 물론 내가 알아서 조정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긴 하나, 피곤과 힘겨움에 쓰러질 지경에서 그러한 일 모두를 감당할 수 있게 해달라고 능력을 간구하는 다른 방법도 염두해 둘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나를 그리로 몰고 갔을 때 나는 포기하고 다시는 일어서지 못할 것이 두려운 것이 아닐까. 그래서 늘 적당히 하며 따라서 영혼의 갈구도 없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 후자의 방법도 있음을 나에게 다시 한번 주지시킨다. 다른 하나는 기준 자체를 perfection에 둬야한다는 것이다. '게으름'이란 책에 이런 애기가 나온다. 한 글자 때문에 해고된 사람 이야기, 공고문에 "입찰전일"까지 금액제출을 "입찰일"까지로 잘못하여 다수는 당연히 입찰전일까지 금액을 제시하는 것이 맞기 때문에 습관상 입찰전일까지 금액을 냈고 다른 이들은 입찰일까지 금액제시를 하면서 시간차에 의한 손해가 발생할 수 있다. 흔히 볼 수 있는 사소한 실수이지만, 이것을 이 책에서는 매사를 꼼꼼히 살피며 성실하게 처리하는데 소모되는 육체와 마음의 노고를 아끼려는 게으름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제시한다. 인간의 불완전함, 바쁨 등을 나의 편함을 위해 이용하는 나, 잊어버리지 않도록 보이는 곳에 적어두든지 해야겠다.
어려움 또는 고난이 나쁜 것만은 아니다. 나에게 있어서 좋은 점은 그 어려움으로 인해 내가 치열하게 고민하게 된다는 점이다. 더불어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역할과 책임도 나를 괴롭히면서 올바른 신앙인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는 계기를 준다. 즉, 고민이 있을 때 오히려 나는 내 존재감을 느끼기도 하는 것이다. 이를테면 '이런 핑계를 대면서 일을 살짝 피해볼까'하는 이런저런 잔머리를 굴리는 나를 보며 '또, 육체적 편함을 추구하고 있군, 그러면서 그리스도인이냐'라고 한편에서 주장하고, 다른 한편에서는 '하지만 환경이 주어지면 나는 열심히 하잖아'하면서 자기 합리화를 하는 나를 동시에 본다. 즉, 어려움을 통해 그에 따른 선과 악에 대해 복합적으로 생각하고 대응하는 하나의 인간을 보며 '나' 자신을 인식하고 나를 느낀다. 그러나, 내가 이리저리 바쁘다보면 나는 해야하는 일에 대해서만 생각을 하고 충실히 하지만 '나'에 대한 생각은 점점 없어지고 그래서 때때로 문득 돌아보면 생각은 없고 기계적으로 행동만 하는 내가 보인다. 그래서 불과 일주일 전에도 독후감을 쓰면서 나를 돌아봤을텐데, 지금 다시 독후감을 쓰면서 이렇게 나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을 가지게 된것이 굉장히 오래만인 듯이 느껴진다.
그렇다면 지금 나의 모습은 어떠한가. 연말이라서 그런것인가? 아니면 휴일이 많아서 그런것인가? 그것도 아니면 벌려놓은 일들을 follow up 하는데 바빠서 이리 영적/정신적/신앙적으로 무감각한 상태에 있는 것인가? QT 5번 해야하는 것중에 2번 안했을 뿐이고, 설교노트 등 소소한 것을 게을리 했을뿐인데, 하지만 새벽기도, 제자훈련도 꾸준히 나가는데 왜이리 하나님과 멀게 느껴지는 것일까.
지금, 나는 일에 쫓김을 당하고 있는 상태이다. 알고서 놓치는 것이 아니라, 막상 다가왔을때, 까맣게 잊고 있었다는 것을 자각하며 내가 놓친것을 깨닫는 경우가 있다면, 문제가 있는 상태이다. 나의 '09년 계획과 이번달 계획을 살피면서 이번달만 참으면 된다고 나를 달랠 것인지 아니면 우선순위를 둬서 하위에 있는 것들을 과감히 잘라버려야 할 것인지 결정하려고 한다. 그러나 나는 사실은 100%를 할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부족한 부분에 능력을 달라고 간구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앞서 말한 바와 같이 하위순위에 있는 계획들을 자른다거나 하면서 그저 모든 것을 나 혼자서 알아서 조절하고 처리하고 있다. 그러다보니 피곤과 어려움속에도 이러한 모든 부분들을 잘 감당할 수 있게 해달라고 절실히 피곤에 쪄들어 기도하는 그러한 갈망과 갈급함이 없다. 언젠가 직장 스트레스 때문에 미쳐버릴 것 같다고 말하는 성도에게 목사님이 새벽기도를 나가보라고 권한것을 들은적이 있다. 그 성도는 목사님이 제정신인가, 지금도 바빠 죽을 것 같은데 새벽기도까지 가면 정말 죽을것이라고 생각하며 투덜거렸다고 한다. 그러나, 계속 그 말씀이 마음에 걸려 새벽기도를 나갔더니, 자신은 할 수 없으리라고 생각했는데 오히려 그 모든 것을 다 감당할 수 있는 능력을 주셨다고 말을 한다.
또한, 나는 죄, 그리고 일에 대해서 완벽에 기준을 두는 것이 아니라 어차피 인간은 어떻게 하든 불완전하다라는 기본 전제를 깔고 90% 또는 imperfection에 기준을 둬서 행하고 처리한다. 기준을 둘 중에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나의 행동, 결과는 확연히 차이가 난다. 즉, 나는 죄에 대해서는 더 관대해질것이고 일에 대해서는 최선을 다하지 않게 된다.
결론을 내리면, 일에 대해 쫓김을 당하고 있다고 느낀다면 물론 내가 알아서 조정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긴 하나, 피곤과 힘겨움에 쓰러질 지경에서 그러한 일 모두를 감당할 수 있게 해달라고 능력을 간구하는 다른 방법도 염두해 둘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나를 그리로 몰고 갔을 때 나는 포기하고 다시는 일어서지 못할 것이 두려운 것이 아닐까. 그래서 늘 적당히 하며 따라서 영혼의 갈구도 없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 후자의 방법도 있음을 나에게 다시 한번 주지시킨다. 다른 하나는 기준 자체를 perfection에 둬야한다는 것이다. '게으름'이란 책에 이런 애기가 나온다. 한 글자 때문에 해고된 사람 이야기, 공고문에 "입찰전일"까지 금액제출을 "입찰일"까지로 잘못하여 다수는 당연히 입찰전일까지 금액을 제시하는 것이 맞기 때문에 습관상 입찰전일까지 금액을 냈고 다른 이들은 입찰일까지 금액제시를 하면서 시간차에 의한 손해가 발생할 수 있다. 흔히 볼 수 있는 사소한 실수이지만, 이것을 이 책에서는 매사를 꼼꼼히 살피며 성실하게 처리하는데 소모되는 육체와 마음의 노고를 아끼려는 게으름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제시한다. 인간의 불완전함, 바쁨 등을 나의 편함을 위해 이용하는 나, 잊어버리지 않도록 보이는 곳에 적어두든지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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