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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5월 15일 금요일

크리스챤 매뉴얼 - 윤동일

[책과 의견]
1. 신은 있다 : 신론
개미들은 인간이 존재한다는 것을 어떻게 증명할까? 신은 증명되어 믿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믿으면 증명이 된다. 믿었더니 경험되는 것이 신이다. 그래서 믿음은 신의 영역이며 선물이라 한다.
=> 신의 존재에 대해서는 내가 용을 쓰며 이해하려고 하면 할수록 오히려 더 수백가지의 의문만든다. 개미가 인간이 존재한다는 것을 증명할 수 없는 것처럼 증명하기를 포기하고 믿으면 된다고 한다. 믿음으로써 경험하게 된다고 한다.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이론)을 해보면(실험) 알게 되는 것이다.
최근의 일로, 말을 조심하라는 성경말씀(이론)이 있고 아침에 QT를 하면서 다시 한번 그 말을 새겼다. 예전에는 준비가 되어 있지 않더라도 일단 말을 시작하면서 두서없이 말하거나, 내 의견을 강조하다 극단으로 치닫는 경우도 있어, 하고 난후 후회한 경우가 있다. 공교롭게도 그 QT를 한 당일날 특정일이 발생했고, 촉박하게 그것에 대해 하나님께 물었고, 물론 답을 해주시지 않았고, 단지 아침에 QT했던 ‘말을 조심하라’는(이것이 답인가?) 말만을 내가 가지고 있었고, 또한 내가 준비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일에 대해 아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말씀을 따랐는데(실험) 그랬더니, 아무말도 하지 못하고 나온 내가 바보같았고 억울하기만 하였다. 차라리, 좋은 언변을 주시지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봤을 땐, 아무말도 하지 않은 것이 나았다. 그 자리는 일방적 통보의 자리였고, 분명 나는 그 자리에서 말을 시작하면, 두서없이 나열하고 분노만 방출하다 나왔을 것이고, 또한, 그것은 내가 그 문제에 대해 그 사람에게 왈가왈부하기에는 주제넘은 짓이기도 하며, 내가 움직이게 해야 할 사람은 다른 사람이기도 한 것이다. 결국 다시 한번 QT의 중요성과 비록 작은 사건이었지만 하나님 말씀은 직접 실행해봐야 알수 있음을 안 사건이었다.
하나님을 어떻게 증명하냐고? 그것을 말로 설명하기는 어렵다. 오히려 의문과 언쟁만 유발한다. 단지, 직접 체험해보라는 것 밖에는. 그것은 현재 나에게, 그리고 그대에게 해당되는 말이다.

2. 인간 사용 설명서 : 인간론
몸이 고통스러워하는 것들은 몸에는 다 좋은 것들이다. 선한 일을 멈추면 오히려 잠이 잘 오고 몸은 편하다. 선한 일을 어렵게 습관들여도 몇 번만 쉬면 금방 원상태로 돌아오는 것이 우리다. 죄된 자리로 돌아오는 관성은 얼마나 큰지 모른다. 그러나 선한 일로 돌아가는 복원력은 전혀 없다. 이것이 우리가 죄성을 가졌다는 증거이다. 사람은 모든 일을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하고 결정한다.

오스카 와일드는 말한다. ‘누구든 친구의 고통에는 공감할 수 있지만 친구의 성공에 진정으로 공감하려면 대단히 고운 심성이 필요하다.’
=>내가하면 사랑, 다른 사람이 하면 불륜이라는 말처럼 사람은 한없이 자기중심적이다. 또한, 서면 앉고 싶고, 앉으면 눕고 싶은 것이, 육체적 편함을 좇는 것이 사람이다. 늦바람이 무섭다는 것처럼 일평생을 한결같이 살아온 사람도 그러한 습관을 버리고 쉽게 죄성에 젖게 되는 것이 인간이다. 어디 갈 것도 없이 나를 보면 안다. 누가 성선설을 주장했는가? pure 한 선함이 있는지 의심스럽다. 한 예로 지금 내가 친구를 도와준다. 이웃사랑의 실천을 하는 아름다운 모습이다. 그러나, 그 속내를 보면 언젠가 그가 내가 필요할 때 도와주겠지 하는 마음이 있으며, 나의 선행으로인해 나 자신이 ‘나, 이런사람이야’라는 교만의 마음도 가지고 있는 것이다. 모든 선한 일들이라고 하는 것들의 배후를 보면, 나의 허영, 교만 등의 시컴한 속내가 있지 않은가. 사람은 그저 악하다는 말 이외 무엇이 더 있을까?

3. 아빠 하나님 : 성부론
부모가 자녀를 낳는 것은 노동력 확보를 위한 게 아니다. 사랑하기 위해서 낳는다. 하나님이 우리를 창조하신 것도 일을 시키기 위한 게 아니었다. 사랑하기 위해서였다.

목자가 잃은 양 한 마리를 찾아 떠났다고 하면 우리는 대부분 아흔아홉 마리 걱정을 한다. 자신이 아흔아홉 마리 양 중에 속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성경 속 보물을 쉽게 찾는 방법이 있다. 성경 속 등장하는 인물 중에 최악의 사람과 자신을 동일시하면 된다. 예수님과 가롯 유다가 있으면 자신을 가롯 유다라는 전제로 말해야한다.

믿어주는 만큼 사람은 변화된다. 많이 믿어주면 많이 변화되고 적게 믿어 주면 적게 변화된다. 사랑하면 믿어주고 믿어주면 기회를 준다. 믿어줄 수 있는데 기회는 줄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은 거짓말이다.

남을 비판하는 것처럼 쉬운 비판도 없다. 남을 비판하면 정의감도 불타오르고 카타르시스도 있다. 우리말에 ‘욕하며 닮는다’는 말이 있다. 남의 약점을 욕하는 사람은 자신이 욕한 그 부분을 그대로 닮는다는 말이다. 사람이 40대가 되면 자신이 싫어했던 아버지의 모습을 판에 박듯 닮아 있음을 알고 소스라치는 경우를 많이 봤다. 바라봄의 법칙 때문이다. 어느 부분을 싫어했다는 말은 그것을 생각하며 살았다는 말이다. 사람은 자신이 바라본 것을 그대로 닮게 되어 있다. 대신 자신을 비판하는 것은 감성을 깨운다. 다른 사람의 마음을 움직여 감동시킨다. 자기 개혁을 해내는 사람은 세상을 개혁할 능력이 있다고 검증된 사람이다.

죄지은 당사자가 죽는 것이 정의이다. 그러나 죄 없는 예수님이 대신 죽으셨다. 이것은 지상 최대의 불의이다.

4. 구원자 예수님 : 성자론
세상은 우리를 사랑하지 않는다. 써먹다가 쓸모가 없어지면 폐기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정신없이 살다가 나이가 들어 은퇴할 때가 되어서야 이런 현실을 알게 된다. 울고불고 세상과 직장이 나에게 그럴 줄 몰랐다고 해보았자 때는 이미 늦었고 소용이 없다. 사람들은 이것을 잊고 우리를 사랑하지 않는 세상에 목을 매고 살아간다. 세상의 모든 부귀영화를 맛본 솔로몬 왕이 말했다.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었다.’
=>하나님은 인간을 만드셨다. 인간은 사단의 꼬임에 넘어가 하나님을 불순종하고 죄가 지배하게 되었다(생각해보니, 사단의 꼬임전에 인간은 원래 죄성을 내재하고 있었던 것 아닌가?). 죄의 삯은 사망이다. 사망하지 않으려면 누군가 대신 나를 위해 죽어야한다. 따라서, 완전무결한 예수님이 과거, 현재, 미래에 지을 나의 죄를 위해 대신 죽으셨다.
그러나 결국은 ‘그것이 뭐?’ 란 얘기가 나온다. 하나님을 믿는다면, 예수님 그리고 성령님까지 옵션으로 해서 같이 믿는 것이다. 즉, 예수님, 성령님에 대한 어떤 이야기라도 믿을 준비가 되어 있는 것이다. 굳이 예수님이 죄가 없도록 하기 위해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 사망을 이긴 것에 대한 증거로서 부활하고 하신 이야기들을 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물론 그렇게 설명함으로써 구원의 역사 전반 걸친 하나님의 치밀하심, 준비하심 등을 부가적으로(또는 논리적이라고 주장하는) 설명해줄 수는 있지만 오히려 그런 이야기는 무수한 의문들만 더 유발시키는 점이 있다. 예를 들자면, 동정녀가 아기를 가질 수 있나?, 어쨌든 정자는 하나님의 영이지만 난자는 여자 것이니 정자, 난자로부터 각각의 DNA가 분리되어 결합하여 아기가 탄생되는 것인데 그럼 반쪽은 인간에게서 나온 것이니 예수님도 죄의 본성을 가지고 있지 않겠느냐?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심으로 인해 죄를 완전히 무찔러버리시지 왜 힘만 약해지게 만드시고는 나머지를 우리에게 맡겼느냐 등 의문만 더 생기는 것이다. 또한, 예수님의 존재는 무엇이냐. 심판의 날, 그날은 ‘아들’도 모른다는데 하나님=예수님=성령, 같은 분 다른 형태라고 생각했는데 그럼, 하나님이 더 파워가 센 것인가 등등의 의문만 더 일으킨다.
이런 나를 보면 참 어지간히도 반항하는구나라는 생각이 든다. 중요한 것은 그것이 아닌데 왜 주변적인 것들, 인간의 머리로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을 가지고 그리 따지느냔 말이다. 예전에는 예수님 부활, 성령님, 등등등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시니 그렇게 하셨겠지라고만 생각했는데, 사람이 나름대로 만들어 놓은 구원의 역사에 대한 논리(?)를 대하다보니 그 논리의 곳곳에 의문만 생긴다.


5. 보혜사 성령님 : 성령론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롬 8:26)
이미 구원받은 사람들이 이제부터 기도해야 할 것이 있다. 성령이 완전히 지배하기를 구하는 기도이다.
=>변하는 사람보다 예수님이 남기고 간 성령님과 친해지고 싶다. 성령이 완전 지배하도록 복종하면 능력도 주신다지 않은가? 그래서, 책을 읽으면서도 어떻게 하면 성령님과 교제를 하고 또 복종하는 방법에 대해 제시해주지 않을까 싶었으나,,,, 없었다.
책에서의 저자의 경우, 결단을 내리거나 어떻게 해야할 지 모를 때 ‘성령님, 내가 여기서 무슨 말을 해야합니까?’ 하니 답을 주셨다. 얼마나 멋져 보이고 편해 보이는지 나도 그렇게 되고 싶단 말이다. 그래서 나도 어찌해야할지 모를 때, 애매할 때 해보았다. 묵묵부답. 성령님의 양식은 말씀이라고 들었다. 말씀도 읽어보았지만, 묵상을 깊게 안해서 그런건지 답이 안보이더라. 그래서 부족한 부분이 무엇일까 생각해보니, 지금 내게 필요한 것은 3분라면처럼 즉석에서 빨리빨리 주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좀 더 시간을 가지고 깊이 묵상하는 것이 필요할 것으로 결론을 내렸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성령의 능력을 활용하라고 하는데, 이것은 내가 하나님께 간구하는 것과 무엇이 다른지 모르겠다. 내가 하나님께 언변의 능력을 달라고 간구하면 하나님이 그것을 들어주시면 나에게 그런 능력이 생기는 것 아닌가? 그럼, 여기서 성령의 역할은 무엇인가? 굳이 성령을 내가 의식하지 않고도, 하나님과의 교제를 하면 성령님이 하나님 지시를 받아 하는 것 아닌가? 성령님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친히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신다면’ 그렇다면, 나는 굳이 간구할 필요 없지 않은가? 나는 하나님, 예수님, 성령님을 굳이 구분하지 않고 대표(?)인 하나님과만 일대일 교제를 하면 되지 않을까?

6. 부름 받은 사역자 : 은사론
훈련은 자신의 노력과 시간의 투자로 얻어지는 결과이므로 자랑하고 교만해 질 가능성이 있다. 자신의 노력으로 얻은 결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은사는 하나님이 주신 전적인 선물이므로 자랑하지 않게 된다. 자신의 노력으로 은사가 주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내가 가진 은사란 무엇일까 생각해본다. 윌로우 크릭 교회에서 시행하는 ‘맛보기 사역’은 그런면에서 자신이 가진 은사를 발견할 수 있는 좋은 프로그램으로 보인다. 즉, 수백가지의 다양한 프로그램을 제공하여 체험하도록 하고, 또한 실패하더라도 정죄하지 않으며 다시 한 번 기회를 주어 자신이 가진 은사를 발견할 수 있게 한다.
중요한 것은 은사 이전에 사랑의 마음을 가지는 것이며, 은사 이후에 그것을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을 위해서 사용하는 것이다. 또한, 누구나 다 처음은 서투를 수 있다. 그러한 부분을 믿고 지원해주는 사람, 교회가 필요하다.

7. 사단이 주는 나쁜 선물 : 죄책감

8. 주여 어서 오시옵소서 : 종말론
스티브 잡스는 2005년 스탠퍼드 대학의 강연에서 죽음에 대하여 이렇게 말했다. ‘곧 죽는다는 생각은 인생의 결단을 내릴 때마다 나에게 가장 중요한 도구였다.’
=>나는 나에게 유리한 것들은 잘 기억한다. 계속해서 넘어지고 넘어지는 나를 보면서 이런 내가 어찌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냐란 생각이 드는데, 이런 죄책감이 사단이 주는 것이라니 넘어지더라도 뻔뻔히 다시 나가는 내가 돼야겠다. 그러나, 나에게 있어 문제는 이러한 것을 이용하는 것이다. 일부러 넘어지면서(유혹에 빠져 쾌락을 즐기고) 나중에 다시 회개하고 나가면 되겠지 하는 생각을 하는 것이다.
또한, 죽는다는 생각을 하면 지금 앞에 닥친 문제들, 어려움이 하찮게 느껴진다. 지금 고뇌하고 있는 부분들이 너무나 작게 느껴진다. 그러나 여기에 함정이 있는 것이 그 생각으로 인해 똑바로 살자, 하루를 열심히 살자, 지금 닥친 고난은 아무것도 아니다라는 생각보다는, 어차피 죽을 것 막나가자, 대충하자, 또는 즐기자는 생각이 더 든다는 것이다. 아직도 하나님(심판) 두려운 줄 모르고, 바로 눈 앞에 있는 달콤함에 정신이 팔려있는 것이다. 아, 알면알수록 자유로워진다는데 왜 나는 점점 더 두려워하는 마음만이 더 들까.


일반적으로 매뉴얼이란 사용설명서로 특정 제품에 대한 기술, 사용방법등을 설명해 놓은 책이다. 전제적으로 이 크리스챤 매뉴얼 책은 오히려 질문만 더 유발하고 답을 주지 않는 책이었다. 즉, 일상적인 소소한 이야기들을 묶어 놓은 책으로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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