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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5월 15일 금요일

내면 세계의 질서와 영적 성장(ordering your private world) - 고든 맥도날드

[책 속에서 & 의견]
[1. 함몰 웅덩이 증후군]

일상의 작은 행위 하나 하나가 우리의 성품을 만들기도 하고 또는 파괴하기도 하며, 우리가 밀실에서 행한 일로 인해 언젠가 지붕 위에서 통곡하게 되리라는 것을 까마득히 잊고 있었다 .- 작가 오스카 와이들 고백

내면 생활을 정돈하는 시간을 규칙적으로 갖고 계십니까?(='당신의 큐티 생활은 어떻습니까?')

=>큐티를 어떻게 하고 있느냐고 물으면 나는 하루에, 일주일에 하고 있는 바를 정량적 정성적으로 나타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같은 말인 '요즘 내면생활을 어떻게 하고 있느냐'고 물으면 난 먼저 내면생활이 뭐지? 부터 생각케 된다. 오스카 와일드가 고백한 바와 같이 '마음', '조종실'이라고 불릴 수 있는 내면을 내버려두면 자신도 모르는 새에 '폭발'하거나 '함몰 웅덩이'처럼 무너져 내릴 수 있다고 경고한다. 겉으로 보기엔 멀쩡해 보이는 땅이, 내부 지하수가 부족해서 갑작스럽게 무너져 내려 집, 잔디, 차 모든 것을 삼키는 것처럼 말이다.


[제 1부 동기 부여]
drivenness(쫓겨다니는 경향), 이는 최선의 이유가 아닌 다른 이유로 스스로 무언가를 이루겠다고 나서는 사람들 속에서 볼 수 있는 특질이다. 그들은 언제 예수님을 따라 나서겠다거나 그런 관계를 통해 무엇을 얻기 원한다거나 하는 식이다. 만약 그들이 제자로 발탁되었다면, 시간이 흐를수록 첫인상에 비해 그들 나름의 계획이 훨씬 더 많았음이 드러났을 것이다. 즉 우리는 그들이 자기만의 스케줄과 전략, 목표와 목적을 가진 인물들이었음을 발견했을 것이다.

쫓겨다니는 사람은 대인 관계 기술을 닦는데 신경쓰지 않는다. 그들에게는 사람보다 프로그램, 과업, 업무가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들의 시선은 목적과 목표에 맞추어져 있기 때문에, 목표를 달성하는데 쓸모가 없다면 주위 사람들에 거의 신경을 쓰지 않는다. 별로 쓸모없어 보이는 사람이 있다면 과업 완수에 방해되는 장애물이나 경쟁상대로 여기기 일쑤다. 쫓겨다니는 사람 주위에서 일하던 동료나 부하 직원은 지치고 혹사당하여 환멸을 느낀 채 하나둘 떠나 버린다. '그 사람과 함께 일하는 건 정말 죽을 노릇이지만, 그는 일은 틀림없이 끝장내는 성격이긴 해', 즉 쫓겨다니는 사람이 지나간 자리에는 희생자의 행렬이 있기 마련이다.

부름받은 사람은 자신이 청지기임을 알고 있다. 청지기의 일이란 주인을 대신해서 어떤 것을 잘 관리하다가 주인이 오면 넘겨주는 것이다. 우리는 일단 무엇인가를 소유하면 그것을 꼭 쥐고 지켜야만 한다고 여긴다. 우리에게는 그것이 직업이나 재산, 타고난 재능, 영적 은사, 건강 등일수 있다. 쫓겨다니는 사람은 그것들을 잃으면 곧 심각한 위기에 빠지게 된다. 이 모든 것을 전부 빼앗긴다면 어떻게 반응하겠는가?

=>과업의 달성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어 목표 달성에 쓸모가 없다면 주위 사람들에게 신경을 안쓰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일일이 care하다 보면 내 일을 지연하거나 못할 수도 있지 않겠는가. 또한, 천성이 다른 사람에게 관심이 없는 것도 작용을 한다. 삶을 좀 더 simple 하게 하면 쫓기지 않고 내면을 들여다 볼 여유, 주변을 둘러볼 여유가 생길까?
나는 가끔 상상해보곤 한다. '내가 건강을 잃는다면, 이에 의해 직장도 잃게 된다면, 나는 무엇에 의지할 것이며, 내 주위에 남아 있을 사람은 있을 것인가?' 이 질문에 No라고 생각되는 것을 봐서는, 내가 외적인 것에 얼마나 의지하고 있는가와 더불어 청지기적인 삶을 살고 있지 않고 있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제 2부 시간 사용]
무질서한 사람은 자신이 한 일이 보잘것 없다고 느낀다. 일을 끝내 놓긴 했어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 사람들의 칭찬을 그대로 믿기가 어렵다. 최선을 다해서 한 일이 아니라는 것을 내심 알고 있기 때문이다.

방치된 시간은 상대적으로 약한 방향으로 흐르기 때문이다. 일정을 제대로 짜지 않은 상태에서 다른 이들의 부탁을 어떻게 거절할 수 있었겠는가? 예를 들면, 내가 영적 훈련을 소홀히 한다고 해서 하나님은 당장 큰소리로 고함을 치시지는 않는다. 그리고 가족을 위해 시간을 할애하지 않았을때도 아내 게일과 아이들은 잘 이해하고 용서해준다. 그러므로 미리 시간을 할당하지 않으면 다른 일에 밀려나기 쉬운 것이다. 즉, 덜 중요한 다른 것들이 그것들을 한주 한주 밀어내곤 하는 것이다. 그것들이 너무 오래 무시되면 마침내 가족 관계나 휴식, 영적훈련 등이 심각한 지경에 처하여 그 결과를 모면하기에는 너무 늦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는 점이다.

=>연말이 되면 다음해 1년의 계획을, 월말이 되면 다음달의 계획을 짜곤한다. 큰 목표와 함께 정량적인 목표도 같이 제시하면서 구체적으로는 하루하루 할일에 대해서도 계획을 세운다. 이러하지 않으면, 맥도날드 말처럼 시간을 방치하게 되면, 그때 그때 발생되는 사건이나 또는 내 감정/기분에 의해 좌우되어 시간을 보내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이번달은 전체적인 목표중 50% 밖에 달성하지 못했네 다음달은 달성할 수 있는 목표로 보정하거나 더 분발해야겠다는 생각도 월말에 하게 된다. 성인이 되어서는 '선생'이 없다. 모든 것을 스스로 판단하고 결정해야 하며 내가 잘못된 길을 가더라도 내가 인지를 하지 못하거나 알려줄 만한 사람도 없다. 그래서 끊임없이 '진리'에 비추어 자기 점검을 하고 일상을 체크해야하는 것이다.

[제 3부 지혜와 지식]
특히 주위에 영향력 있는 사람이 많아서 그들이 우리 대신 생각해 줄 수 있을 때에는 정신력이 약해지는 것을 방치하기가 쉽다.
엘튼 트루블러드 : "다음 세가지가 잘 계발되지 않는 한 생명력 있는 기독교란 불가능하다. 바로 내적으로는 헌신하는 삶, 외적으로는 섬기는 삶, 지적으로는 합리적인 삶이다."
올리버 웬델 홈즈 : "행동하는 사람은 현재를 소유한다. 그러나 사고하는 사람은 연구를 통해 미래를 얻는다."


=>지적인 성장을 위해 세가지를 권하는데, (1) 경청하는 것, (2) 독서, (3) 공격적인 공부이다. 경청에서 특히나 어려운 것이 비판 부분일 것이다. 네비게이터 창시자인 도슨 트로트맨은 아무리 공정하지 못한 비판처럼 보일지라도 항상 그것을 기도의 밀실로 가지고 가서, "주님, 이 비판속에 감추어져 있는 진실의 알맹이를 보여 주소서"라고 기도했다고 한다. 비난을 받을 때 대부분 내가 하는 행동은 변명을 통한 방어하기에 급급하거나 나역시 상대를 비난하는 모습이다. 한번도 비난하는 자의 입장에서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이 없는 듯하다. '사랑하는 마음에서 혹은 화가 난 고통스러운 상황으로 인해' 나를 비판할 수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내가 비판하는 입장에서 돌아보면, '왜 나는 사랑하고 잘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말을 하는 것이 상대방은 비난으로 받아들이고 결국 논쟁으로 발전하게 되버린 걸까?' 또는 내가 그러한 부분에 대해 불편하고 너로 인해 피해를 당해서 화가 난다. 그것을 왜 나는 잘못, 죄에 대해서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화난 감정까지 같이 폭발적으로 표출하여 말을 하는가?

맥도날드는 독서를 위해 한시간씩 배정한다고 한다. 그리고 항시 읽고 있어야 한다고 한다. 독서는 시간이 있을 때 하는 것이지 시간까지 배정해서 해야하는 필수적인 것으로는 생각지 않았다. 또한, 내 주변 사람이 책을 읽고 있을 때도 여유가 있으니 읽나보다라는 생각을 하고서 중간에 방해하는 일에 전혀 거림낌이 없었다. 그는 항시 책을 읽어야 한다고 한다. '당신은 지금 무슨 책을 읽고 있는가?'


[제 4부 영적인 힘]
우리 대부분은 아무말도 하지 않거나 남의 말을 한마디도 듣지 못하는 분위기에서는 단 한 시간을 보내기도 힘들어한다.

우리는 모두 기도 시간에 무미건조한 순간들을 경험한 적이 있을 것이다. 나는 그것이 반드시 나쁜 징후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우리가 최선의 기도라고 느끼는 것이 사실은 최악의 기도가 아닐지 가끔 의심해 본다. 즉, 우리가 느낀 즐거움이 실은 춤을 추거나 시를 낭송한 다음 느끼는 일종의 성취감에 불과한 것은 아닐까 생각해 본다. 하나님은 우리와 더불어 대화하기를 원하시는데 우리는 그분에게 일방적으로 말하기를 고집하여, 우리 기도가 때로 잘못되는 것은 아닐까? - CS 루이스

우리의 내면세계는 날마다 이 시대의 메시지로 온통 폭격을 당하고 있다. 그 메시지들은 영적인 성격을 가진 것이라면 무엇이든 시간 낭비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우리는 아주 어릴 때부터 오직 행동으로만 무언가를 성취할 수 있다고 은연중에 배워왔다. 그런데 기도는 일종의 행동 부재로 보인다. 내면이 무질서한 사람에게는 그것으로는 아무것도 성취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이기 마련이다.


[제 5부 회복]
우리 사회가 무척 여가 지향적인 사회라는 사실에 비추어 볼 때 우리 세대의 피로는 참 이상한 현상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과거 어느 때보다 더 많은 여가 시간을 갖고 있는것 같다. 주5일제 근무제는 역사상 비교적 최근의 고안물이다. 그런데도 왜 우리는 극도의 피로에 찌들어 살고 있는 것일까? 이 피로감은 실재하는 것인가 아니면 상상의 산물인가?

하나님은 쉬실 때 자신이 하신 일을 바라보고 그 완성된 모습을 즐기며 그 의미를 묵상하셨다. 이러한 쉼은 무엇보다도 먼저 되돌아보는 시간, 곧 회로를 닫는 시간인 것이다.

우리 교회의 한 형제가 '저는 안식일이 일주일에 하루만 있어서 기쁩니다. 매주 오늘 같은 안식일이 있었다가는 완전히 탈진하고 말겁니다.'라고 말했다. 이 유머는 사실 일요일을 쉴 수 없는 날로, 어떤 이들에게는 일주일 중 가장 긴장된 날로 바꾸어 버린 그리스도인 지도자들과 교회들에 대한 심각한 고발이다.

=>쉼이란 무엇일까 생각해본다. 왜 나는 종일 쉬었는데도 불구하고 다음날 피로감과 허무함을 느끼는 것일까. 지금까지 내가 쉴 때는 무엇을 했는가. 보통은 미드와 소설과 만화로 하루를 보내는 경우가 많다. 잠깐의 즐거움(쾌락)은 준다. 그러나 우리의 위를 솜사탕으로 채울때 잠깐의 달콤함만을 느끼고 사라지듯이 그것은 우리의 위를 채우고 우리의 몸과 마음에 영양분을 주는 '밥'은 아닌것이다. 다른 사람의 '안식'을 위해 목사가 직업인 사람은 '안식일'이 '안식일'이 아닐수 있다. 유대인들은, 안식일날 먹을 음식을 그 전날 함으로써, 주부는 안식일을 정말 쉼으로써 보낼 수 있게 된다.

나는 안식일을 어떻게 보내고 있는가? 또는 쉬는날을 어떻게 보내고 있는가? 주일은 종일 분주함으로 보내게 된다. 예배를 드리면서 한주간을 되돌아보고 묵상하는 시간, 일상생활에서 정기적으로 멈춰서서 우리 삶의 근거가 되는 진리와 헌신을 되새기는 시간이 되어야 하는데 빡빡하게 짜여진 스케쥴과 함께 이곳저곳을 이동하면서, 그리고 일주일만에 만난 사람들과 교제를 하면서 다시 세상적인 일로 내 머리와 마음을 가득 채워오는 것이다. 이리하고 집에오게되면, 사실 지친 마음이 더하다. 지금 현재의 시스템으로는 그럴 수 밖에 없다면 나도 맥도날드처럼 나만의 안식일을 정해서 쉬고 재충전해야하는 날이 필요하다. 그것이 나에게는 현재는 토요일일 수 있으며, 잠깐의 즐거움을 통한 육적/영적 피로로 결론이 나기전에 산책과 독서, 그리고 홀로 광야의 시간을 가질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 즉, 나는 지금 '진정한 안식, 쉼'의 훈련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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