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속에서]
껍데기만 선교사였지 속은 옛사람 그대로였다. 예수님처럼 바울처럼살게 해달라고 기도했던 예전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귀청을 찢는 총소리에 나의 안전을 갈구하고, 가난한 이웃들을 바라보며 불평하는 부족하고 못난 사람이었다.
하나의 기적이 일어나려면 진정한 희생과 눈물겨운 기도가 있어야한다.
이 세상에 올 때 누구도 아무것도 가지고 오지 못하지만, 갈 때는 다르다. 많은 것을 남기고 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아무것도 남기지 못한 채 가는 사람도 있다. 하나님으로부터 생명을 받고 사명을 받은 우리는 이땅 위에 무엇을 남겨야 할 것인지 고민해야 한다.
몸이 아프고 마음이 아팠기에 한 영혼의 소중함을 알게 되었다.
하나님이 주신 감동은 하늘의 언어요. 천국의 찬양이며 넘치는 은혜다. 성령이 주시는 감동은 변화의 시작이요 부흥의 기조일 뿐 아니라 예배의 회복이다. 선교란 거창한 논리도 일방적 주장도 아닌 하나님이 주신 잔잔한 감동으로 수행해나가야 한다. 그렇게 해야 한다.
=======================================================================================
하나의 기적이 일어나려면 진정한 희생과 눈물겨운 기도가 있어야한다.
이 세상에 올 때 누구도 아무것도 가지고 오지 못하지만, 갈 때는 다르다. 많은 것을 남기고 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아무것도 남기지 못한 채 가는 사람도 있다. 하나님으로부터 생명을 받고 사명을 받은 우리는 이땅 위에 무엇을 남겨야 할 것인지 고민해야 한다.
몸이 아프고 마음이 아팠기에 한 영혼의 소중함을 알게 되었다.
하나님이 주신 감동은 하늘의 언어요. 천국의 찬양이며 넘치는 은혜다. 성령이 주시는 감동은 변화의 시작이요 부흥의 기조일 뿐 아니라 예배의 회복이다. 선교란 거창한 논리도 일방적 주장도 아닌 하나님이 주신 잔잔한 감동으로 수행해나가야 한다. 그렇게 해야 한다.
=======================================================================================
이 책의 처음 부분을 읽을 때 내전이 발발하려는 상황속에서, 많은 외국인들이 빠져나올려고 하는데도 불구 굳이 들어가려하는 저자를 보고, 무모함을 넘친 만용이라고 맘속으로 감히 비난했다. 첫인상이 좋지 않아서인지 읽으면서도 큰 기대를 하지 않았다. 그러나 화려한 미사여구는 아니지만 담담한 사실을 나열하는 그 속에서 지금 내 마음은 감동으로 꽉 차있다. 그저 내 자신이 참으로 부끄럽기만하다. 그동안 안전하고 안락함 속에 묻혀서 그 조그만 테두리 안에서, 발버둥치며 부족하다고 아우성 치는 내 모습, 또한 그러한 생각의 제한에서 그려보았던 직장 선교라는 비전, 참으로 우물안 개구리인 것이다. 내가 비록 단기선교이지만 선교를 가야하는 입장임에도 선교사의 입장이 아니라 나는 이 책에 나오는 선교를 받고 변화된 사람들로부터/구원을 받은 사람들로부터 도전을 받는다.
[감동이 있어야 변화가 있다]
수십년동안 술과 담배를 피고 깡패짓을 해온 한 집안의 가장이 예수님을 믿고 자녀들로부터 가장 존경하고 사랑하는 아빠라는 소리를 들을 만큼 변화되었다. 이 책을 읽으면서 이 사람들은 어떻게 이리 쉽게 변화하는가 놀랐다. 어떻게 그렇게 상황이 안 좋은 가운데 더 행복하고 더 변화될 수 있단말인가. 그렇다면 대체 나는 뭐가 부족해서 이전과 똑같은 생활을 하고 있단 말인가.는 의문을 해본다. 답은 어느정도 알고 있다. 내 손에 쥐고 있는 것을 놓지 않는 것이다. '내려놓음'이란 책을 읽으면서도 나는 책에서 제시된 그러한 부분에 욕심도 없고 다 내려놓고 있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그때 문자 그대로만 받아들였나 보다라는 생각과 지금에야 '내려놓음'에 대한 감이 조금 잡힌다. 예를 들면 내가 현재 내려놓지 못하고 꽉 쥐고 있는 것은, 내가 내 나름대로의 또는 세상의 보편적인 상식이기 때문에 그것에 편승하여 나도 그것이 정의라고 생각하여 불평 불만, 그리고 분노를 뿜는 것이 있을 수 있다. 즉, 하나님이 말씀하는 바는 내가 분노하고 정의라는 이름으로 revenge를 하는 것이 아니라 다윗처럼 하나님 손에 맡기며 인내하기를 바라시는 것으로 보인다. 성경적인 관점은 세상적인 관점과 확연히 반대된다. 그것을 말씀하시는데 나는 교회에서는 하나님을 기준으로 교회일을 하고, 세상에서는 세상의 법칙을 기준으로 세상일을 처리하는 이분법적 사고를 지니며 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잘못된 것인지 모르는 것이 문제이다. 다윗에게 사울을 죽일기회를 놓쳤다고 대놓고 그를 비난하고, 압살롬을 죽여야한다고 주장하는 요압처럼, 세상적인 관점에서는 그러한 분노가 정의라는 이름으로 포장되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이 당연시 여겨진다. 내가 요압이 되기도 하고 주변 친구, 동료 그리고 내가 지금까지 배워왔던 경험 들이 요압이 되어 나에게 이야기 한다. 나는 지금 이제야 내가 무엇을 쥐고 있는가만 알고 있는 상태이며 내 마음에서는 여전히 그것을 쥐고 놓고 싶지 않은 마음을 가지고 있음을 인지한 상태뿐이다. 또한, 삶에서 변화가 없는 이유는 하나님을 실제로 겪어보지 않았기 때문에 감동이 없기 때문이다. 여전히 탁상공론처럼 내 머리속에서만, 그리고 안전한 교회안에서만 하나님 말씀을 부르짖으며 실제로 그것이 적용되어야하는 삶에서는 여전히 나의 육체적 편함, 사회의 보편적 상식, 불만 등을 따르는 것이다. 내려놓으면 당장 눈에 보이는 계산으로는 손해 볼것만 같기 때문이다. 말씀=>적용=>깨달음/감동=>변화 에서 두번째 단계부터 나의 정욕에 눈이 멀어 막히는 것이다. 그러나 삶이 선교가 되도록, '변화'의 길로 갈 수 있도록 나를 이끌어주시기를 바라는 마음을 갖기를 소망한다.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