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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5월 15일 금요일

형제를 위하여 깨어지는 삶 - 케파 셈팡기

[책 속에서]
그리스도는 우리의 개인적 경건을 위해 죽으신 것이 아니다.

모세에게 '네 손에 있는 것이 무엇이냐?'고 물으셨다. 모세는 그것이 단지 초라한 목자의 지팡이일 뿐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사용하시기를 원하셨지만 모세는 하나님께서 그 분의 영광을 선포하시기 위해 세상의 약하고 천한 것들을 사용하시리라는 것을 믿을 수가 없었다.

우간다에서 고아원을 열었다. 마을에 가서 고아를 데려오는 일은 항상 낙심되고 굴욕적이 경험이었다. 내가 차를 몰고 나설 때 다른 열명의 고아들이 지쳐서 나가떨어질 때까지 내 차를 쫓아오곤 하였다. 그 때 나는 마음이 몹시 상하기 시작했다..."주님, 왜 다른 열명의 고아들은 내버려두고 한 명의 고아만 데리고 와야합니까?" 그러나 그때 깊은 좌절의 침묵 속에서 나는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을 확신하곤 했다. "내가 네게 데려오기를 원하는 것은 바로 이 한 명이다." 주위의 필요는 분명 내가 가진 모든 자원보다 훨씬 더 많다. 내가 본 악의 거대함에 비추어 보았을 때 나의 한계는 나를 괴롭히기 시작했다. 나는 겸손해졌으며 나 자신이 소모될 수 있다는 사실에 의해 깨어졌다. 하나님께서 원하신 것은 나의 봉사만이 아니라 바로 나자신이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어쩐지 우리의 운명은 주님의 운명과 달라야 할 것처럼 생각하게 되었다. 우리의 주인은 인간에게 멸시당하고 거부당한 채 십자가에서 돌아가셨다고 하는 사실을 잊어버렸다. 우리의 노력이 우리가 돕고자하는 바로 그 사람들에 의해 저지당할 때에는 우리는 그들을 내어던져 버리고 싶어진다. "주님 나는 이러한 죄인들을 위해서 죽고 싶지는 않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없습니까? 더 감사할 줄 알고 더 재능있는 사람들 말입니다. 당신의 왕국에서 내가 보다 성공적이라고 느끼게 해 줄 사람은 없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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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번에 읽은 '담'책에 대해 느낀점을 쓰면서 내가 왜 공동체, 소그룹에서 여전히 괴리를 느끼는가 의아한 생각이 들었지만, 명확히 설명할 수는 없었다. 친구와 얘기를 하면서 조금 정리가 되었다. 예를 들어보자. 소그룹, 제자훈련반에서는 구성원간에 속깊은 이야기들을 많이 한다. 나라면 못할텐데 저런 얘기까지 오픈할 정도라고 생각할 만큼 자신의 치부, 문제점, 가정사, 일등에 대해서 낱낱이 이야기하는 경우가 있다. 아주 친한 친구에게나 할 만한 또는 혼자 간직할 만한 이야기들을 공유하는데 왜 나는 그러한 소그룹이 한텀(term) 끝나면 (또는 여러 다른 아웃리치, 수련회 등의 모임일수도 있다) 데면데면한 남으로 돌아갈까 의아스럽게 생각했다.

일전에 미국에 정신과가 성행한다는 얘기를 언급한 적이 있다. 지금 교회 안의 공동체는 그러한 정신과에서 하는 역할과 비슷한 역할을 일부 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우리는 문제를 누군가와 공유하고 싶어하지만 너무 내밀한 것이라 심지어 친구, 와이프 등에게까지 거리를 두며 공유를 하지 않는다. 따라서, 내 문제점을 털어놓아 카타르시스를 느낄 수 있고, 이해를 얻을수 있고, 치유책도 줄 수 있는 안전하고 비밀보장이 되는 정신과로 들고 가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러한 내면의 깊은 것을 서로 공유하지만 심리학자, 정신과의사와 친구가 되지는 않는다. 교회 공동체에서도 나는 내 안의 문제를 털어놓음으로서 해방감을 느끼고, 조언을 얻고 또한 암묵적으로 그 그룹내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대해서는 비밀이 보장되는 크리스챤 윤리가 있음으로 인해 secure함을 느낀다. 그러나 정신과 의사와 친구가 되지 않는 것처럼 그 그룹이 끝나면 나는 다시 내 일상으로 돌아오고 또 다른 공동체에서 그러한 문제들을 얘기하는 과정을 되풀이 한다. 그러한 부분이 상처가 되기도 한다. 즉, 내밀한 속내를 드러냄으로서 나는 상대에게 상당한 친밀함을 기대하며 일반적인 상황에서라면 친한 친구가 되고도 남을 것을 기대한다. 그러나 그것은 교회만의 하나의 문화일수도 있고 그에 대해 나는 잘 적응을 못하는 것일수도 있다.

이 책은 내가 평소에 생각했던 두가지를 짚어준다. 첫번째는 주위의 필요와 그에 대응하지 못하는 나 자신의 한계, 두번째는 나를 드러내고자 다른 사람을 돕는 내 모습이다.

고양이를 좋아하는 나, 그래서 고양이 사료, 모래, 장난감, 의료비용에 나가는 돈이 한달에 쏠쏠하다. 농담삼아 나는 비록 라면을 먹지만 고양이를 위해서 '오가닉 사료'를 준다고 말하기도 할 정도이다. 이런 나에게 직장동료는 지금 서울역에 거지들이 얼마나 많은 줄 아냐면서 고양이는 야생으로 돌려보내고 그 돈을 그러한 사람들을 돕는데 쓰라고 한다. 해외 기아들을 돕는데 기부하는 사람들에게는 지금 우리나라에 밥도 못먹고 다니는 애들이 얼마나 많은데 우리나라부터 기부해야지 하는 말을 한다. 그들 나름대로의 타당한 이유는 있지만, 상대적이라서 다른 사람이 더 큰 것을 들고 공격하고자 하면 할말이 없다. 지금으로서 나의 생각은 그 사람들은 사지 멀쩡하지 않냐. 조금이라도 할 수 있는데 안하는 것이지 않냐(하지만 정말 70% 정도는 환경에 의해 할 수 없다고 한다)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동물은 무슨 죄란 말인가. 걔네들은 아프면 아프다고 말도 못하고 그저 본능대로 솔직히 살아가는 존재 아닌가. 또한 무엇보다 나는 그들로 인해 기쁨을 얻는다. 과히 좋은 예시는 아니지만, 이를 통해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고아 열명을 버려두고 한 고아를 찾아나서는 것, 사람에게 쓸 수 있는 것을 동물을 위해 소비하는 것, 이러한 것이 나의 한계이고 역시 나를 가끔 괴롭힌다. 그러나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바는 나의 영역이 지금보다 더 넓어져서 더 많은 사람들을 포용할 수 있도록 기대하는 것이다

정말 친구들에게 대하는 것을 보면 나에게 감사든지, 보답이든지 pay back해줄수 있는 친구에게 잘해주는 나를 본다. 또한, 내 계획안에 도와주는 것을 선호하는데 그들에게서 칭찬과 좋은 아이라는 인식을 심어주기를 원하는 기대로 인한 것이다. 즉, 이미 나는 나의 행동에 대한 감사를 사람들에게서, 세상에서 받았다.
이름도 빛도 없이 다른 사람을 섬기는 것이 차암 어렵다. 내가 이렇게 노력해도 그 사람은 알아주지도 못하는데 왜 해야하는가.는 생각을 가끔하는 나를 인식한다. 행동을 하기 전 이에 따른 결과를 생각하는 것이 나인데 그러한 결과/보상이 '무'라면 행동자체를 하려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누구나 생각하는 세상적인 생각이고, 그리스도인으로서는 세상에서 '무'를 받더라도 주님이 주실 영광을 바라보며 소망을 가지며 나아가야한다는 것이다. 한 예를 들면 특정위치에서 중책을 맡고 있는 리더들 그리고 그들과 함께 일하는 동역자들, 행사 하나를 하더라도 그 행사의 결과물만 보는 나로썬 쉽게 비판을 한다. 그들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준비하는 수많은 땀과 노고를 쉽게 보고 알지 못하는 것이다. 내가 그들에게 역지사지 정신을 생각하며 감사를 표시하고, 또한 내가 그들의 입장에 있을 때 하나님이 주실 상급을 소망하며 제발 표시나지 않는 낮은자를 섬길수 있도록 되었으면 한다. 그러한 측면에서 지금 필요와 상급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를 care하는 마음으로 한 친구에게 전화를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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