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속에서]
'우리에게 저 칼을 주고 자기는 우리 파인애플을 먹겠대'
나는 원주민들에게 서로 사랑하라, 서로 친절하게 대하라고 가르쳤습니다. 그러면서 나는 항상 내 권리를 앞세웠고, 원주민들은 그것을 다 알고 있었습니다. '하나님, 제 시간은 주님의 것입니다. 만약 주님께서 저에게 이곳에서 하모니카, 그릇, 삽을 고치라고 하신다고 해도 따르겠습니다.' 나는 성경 번역을 많이 하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나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께 돌아왔습니다.
1. 당신을 화나게 만드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보십시오.
2. 다른 사람이 침해하고 있는 당신의 권리를 나열하십시오.
3. 당신의 권리를 모두 하나님 앞에 내려놓으십시오.
4. 무슨 일이 있어도 하나님께 감사하겠다고 결심하십시오.
5. 앞으로 화는 하나님의 경종으로 활용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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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원주민들에게 서로 사랑하라, 서로 친절하게 대하라고 가르쳤습니다. 그러면서 나는 항상 내 권리를 앞세웠고, 원주민들은 그것을 다 알고 있었습니다. '하나님, 제 시간은 주님의 것입니다. 만약 주님께서 저에게 이곳에서 하모니카, 그릇, 삽을 고치라고 하신다고 해도 따르겠습니다.' 나는 성경 번역을 많이 하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나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께 돌아왔습니다.
1. 당신을 화나게 만드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보십시오.
2. 다른 사람이 침해하고 있는 당신의 권리를 나열하십시오.
3. 당신의 권리를 모두 하나님 앞에 내려놓으십시오.
4. 무슨 일이 있어도 하나님께 감사하겠다고 결심하십시오.
5. 앞으로 화는 하나님의 경종으로 활용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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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권리, 의무 vs. 너의 권리, 의무
파인애플 스토리에는 한 선교사가 나온다. 그가 선교하는 열대 우림에는 신선한 과일 보급이 어렵고 그당시 그는 몹시도 파인애플이 먹고 싶었다. 파인애플을 심고 3년을 기다려 수확을 하려는 찰나 자꾸만 그것을 훔치는 원주민들로 인해 그는 화가난다. 몇번을 말해도 알아듣지 못하는 그들을 벌 주기 위해 그가 선교하러 온 목적인 의료시설을 닫아버리는 방식을 쓰게된다.
직장이나 생활에서 너무나 비합리적인 것을 많이 봐서, 합리적인 선, 상식선만 지켜도 내 자신에 대해 잘하고 있는 거라고 여겼다. 그래서 선교사가 파인애플에 대한 그의 권리를 주장하는 것이 당연하게 생각되었다. 원주민 그들도 파인애플이 자신 것이 아니라 훔친다는 것을 인정했으며 따라서 그에 따른 벌을 주는 것이 세상의 이치이다. 선교사가 한 일은 하나님에 기준을 둔 것이 아니라 세상에 기준을 두고 그들이 자신의 권리를 무시했기 때문에 나도 그렇게 하겟다는 eye for eye라는 개념으로 행동한 것이다. 선교사의 정당한 분노에 공감하는 것은 내가 여전히 세상적인 기준으로 선교사를, 원주민을 보기 때문일 것이다.
거기에 더해, 선교사는 나는 여기에 삽이나 고치려고 온 것이 아니라, 너희들에게 사람의 생명을 구하는 큰일을 해주러 온 것이며 내가 너희에게 바라는 것은 사실은 마땅히 누려야 할 작은 나의 권리를 요청하는 것이라고 자신도 모르는 새 교만을 부린다. 즉 그는 그의 시간/권리는 좀 더 가치있다고 생각하고 성경번역이나 의료사역과 같은 좀 더 폼나고 중요한 일을 하기를 바란다. 그리고 때에 따라 세상적인 상식을, 그가 속한 환경, 즉, 예를 들면 원주민들의 생명이 하찮게 여겨지는 열대우림의 환경을, 자신의 불의를 변명하기 위한 수단으로 적절히 이용한다.
심지어 한단계 더 나아가 그의 마음속에 있는 분노를 주체할 수 없어 내가 못먹으면 다른사람도 못먹게 하겠다는 마음을 가지고 그토록 애지중지하던 파인애플 100그루를 뽑아서 버린다. 한 그루도 아니고 100그루를 뽑으면서 그가 생각했던 것은 무엇일까. 단지 다른 사람을 괴롭히는 즐거움과 분노에 취해 그러한 행동들을 해버린 것이다. 벼룩 잡으려다 초간 삼간 태우는 것과 마찬가지 아닌가. 결국 원주민들은 얻을게 없는 그 선교사로부터 점점 더 멀어진다. 일정 시간이 지난후 그는 우리가 파인애플 먹으러 이 오지에 선교하러 온 건 아닌데 하며, 결과적으로는 그런식으로 결론이 나버린 파인애플 사건에 대해 자조한다. 분노가 점점 커져서 다른사람을 상처줌을 통해 결국 자신이 상처받는 결과를 초래하게 된 것이다. 분노란 사소한 것에서부터 시작하여 끊임없이 그것만 생각하고 집착하다가 점점 더 커져서 폭발하는 그런 위험한 것임을 보여준다.
어찌나 내 모습과 똑같은지. 내가 내는 분노는 정당하다고 친구들이, 직장동료들이, 가족이, 세상이 말을 한다. 심지어 같은 신앙인들도 공감을 하며 내 권리를 누리며 살지 않는 것은 이상하고, 너무 신앙적이고, 바보라는 생각이 들게끔 한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오롯이 하나님과 나밖에 믿을 게 없다. 내가 말씀을 지속적으로 읽지 아니하고 기도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기준은 점점 엷어져서 세상의 기준으로 물들게 될 것이다. 그리고 나는 여전히 대다수가 옳다고 여기는 세상적인 기준들에 의해 살아가면서 세상적인 행동을 하며 살아갈 것이다.
사울을 대했던 다윗이 생각난다. 미친 사울이 그에게 여러번 창을 날렸다. 그는 다만 피하기만 할 뿐 또다시 그의 자리에 나아갔다. 압살롬이 반역할 것을 알았음에도 그를 제거한 것이 아니라 다윗은 피하는 쪽을 택하며 자신의 손으로 피를 묻히는 것이 아니라 그의 적을, 하나님 손에 맡겼다. 세왕이야기, 그책에서도 말하다시피 다윗은 누구나 공가하는 충분한 정의가 있었으나, 그럼에도 그를 주장하지 않고 그 자신이 피하고 지는 쪽을 택했다. 나는 그동안 다윗을 어쩜 그렇게 쉽게 보아왔는지. 단지 일개 바세바를 범한 사건만 가지고 그를 쉽게 판단하고 비판했다. 그가 가진 인내, 그리고 그것을 실제 생활에서 적용하는 다윗이 심히 정상이 아닌 것처럼 보일만큼 대단해 보인다. 나의 현재 모습은 그의 보좌관 요압처럼 길길이 날뛰는 상태이다. 그 책에서 다윗이 말하길, '그가 날 죽이는 것이 내가 그의 방법을 배우는 것보다 낫소. 그가 나를 죽이는 것이 내가 그와 같이 되는 것보다 낫소'라고 하면서 복수하지 않으리라 다짐한다. 지금 내가 불만을 가지고 그를 미워하고 기회가 있다면 언제든지 행동으로 옮겨질 수 있는 '불만', '분노' 때로는 '정의'처럼 보이는' 씨앗을 품고 있다면 나도 훗날에는 그와 똑같은 인간이 되는 것일까. 하나님은 그렇다고 대답하시는 듯하다.
이분법적 사고 : 자, 지금부터는 선교할 시간
여기에 나오는 선교사를 보면 이분법적 사고가 보인다. 그가 자신의 권리와 의무를 구분 짓듯 생활이 선교가 아니라, 자신의 생활과 선교를 구분짓는다. 이분법적 사고에 길들여진듯하다. 헬스클럽에서 하는 것은 운동이며, 일반 거리를 걷는 것은 운동이라고 생각지 않는다. 교회와 세상을 구분짓고, 교회만 들어가면 사람이 change된다. 즉, 지금부터는 신앙인이니, 단기선교, 아웃리치, 동역자들을 돕는데 힘쓸것이다라는 생각을 가진다. 그러나 다시 세상으로 돌아와서는 하나님의 법칙으로 살다간 먹히기 쉽기 때문에 그것을 모른체하며 세상에서의 법칙을 따르며 survival 경쟁에 참여한다. 이런식의 사고를 하게된 이유가 무엇일까 곰곰 생각해보니, 목적/일 중심의 사고가 어느정도 기여하는 듯하다. 선교사는 선교의 목적을 '섬김'이 아니라 '의료사역'에 두었고 그에따라 그는 선교사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하고있다고 생각했다. 나의 경우를 살피면, 아웃리치/단기선교의 목적을 '그나라에 대한 섬김과 복음전파'로 볼 경우, 같이 가는 동역자들은 목적을 이루기 위한 요소로 간주하여 그들에 대해서 역시 같이 섬겨야하는 사람들이란 것을 잊게되는 우를 범한다. 직장도 마찬가지로, 이전에 직장을 사역지로 생각하고 '일과 사람들을 변화시켜야지' 하는 비전을 가졌었나보다. 그러나 행태를 보면, 내가 직장의 목적을 '섬김'이 아니라 '일'에 둔 것이 확실하다. 선교사처럼 '섬김'은 내 머리안에 있고, 일은 실제 현실에 있어 이 둘이 융합이 안된 상태이다. 그래서 내 일상생활, 직장생활이 선교가 되지 않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간단하게 풀이될 수도 있을 듯하다. 내 인생의 비전을 '섬김 & 전파"로 삼는다면 당연히 일은 2위자리로 밀려나게 될 것이다. 문제는 비전을 남들 하는대로 그럴듯하게 만들지만 내가 사실은 그럴 마음이 없다는 것과 여전히 세상적인 욕심을 손 안에 쥐고 놓지 않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요즘 한손에는 불만을 다른 손에는 육체적 편함을 쥐고 있던 것을 슬쩍 놓아보려고 한다. 다윗처럼 나를 세우신 이도 하나님이요. 폐하실 이도 하나님이라고 찬양하며 담대함과 인내를 가질 수 있도록 기도한다
파인애플 스토리에는 한 선교사가 나온다. 그가 선교하는 열대 우림에는 신선한 과일 보급이 어렵고 그당시 그는 몹시도 파인애플이 먹고 싶었다. 파인애플을 심고 3년을 기다려 수확을 하려는 찰나 자꾸만 그것을 훔치는 원주민들로 인해 그는 화가난다. 몇번을 말해도 알아듣지 못하는 그들을 벌 주기 위해 그가 선교하러 온 목적인 의료시설을 닫아버리는 방식을 쓰게된다.
직장이나 생활에서 너무나 비합리적인 것을 많이 봐서, 합리적인 선, 상식선만 지켜도 내 자신에 대해 잘하고 있는 거라고 여겼다. 그래서 선교사가 파인애플에 대한 그의 권리를 주장하는 것이 당연하게 생각되었다. 원주민 그들도 파인애플이 자신 것이 아니라 훔친다는 것을 인정했으며 따라서 그에 따른 벌을 주는 것이 세상의 이치이다. 선교사가 한 일은 하나님에 기준을 둔 것이 아니라 세상에 기준을 두고 그들이 자신의 권리를 무시했기 때문에 나도 그렇게 하겟다는 eye for eye라는 개념으로 행동한 것이다. 선교사의 정당한 분노에 공감하는 것은 내가 여전히 세상적인 기준으로 선교사를, 원주민을 보기 때문일 것이다.
거기에 더해, 선교사는 나는 여기에 삽이나 고치려고 온 것이 아니라, 너희들에게 사람의 생명을 구하는 큰일을 해주러 온 것이며 내가 너희에게 바라는 것은 사실은 마땅히 누려야 할 작은 나의 권리를 요청하는 것이라고 자신도 모르는 새 교만을 부린다. 즉 그는 그의 시간/권리는 좀 더 가치있다고 생각하고 성경번역이나 의료사역과 같은 좀 더 폼나고 중요한 일을 하기를 바란다. 그리고 때에 따라 세상적인 상식을, 그가 속한 환경, 즉, 예를 들면 원주민들의 생명이 하찮게 여겨지는 열대우림의 환경을, 자신의 불의를 변명하기 위한 수단으로 적절히 이용한다.
심지어 한단계 더 나아가 그의 마음속에 있는 분노를 주체할 수 없어 내가 못먹으면 다른사람도 못먹게 하겠다는 마음을 가지고 그토록 애지중지하던 파인애플 100그루를 뽑아서 버린다. 한 그루도 아니고 100그루를 뽑으면서 그가 생각했던 것은 무엇일까. 단지 다른 사람을 괴롭히는 즐거움과 분노에 취해 그러한 행동들을 해버린 것이다. 벼룩 잡으려다 초간 삼간 태우는 것과 마찬가지 아닌가. 결국 원주민들은 얻을게 없는 그 선교사로부터 점점 더 멀어진다. 일정 시간이 지난후 그는 우리가 파인애플 먹으러 이 오지에 선교하러 온 건 아닌데 하며, 결과적으로는 그런식으로 결론이 나버린 파인애플 사건에 대해 자조한다. 분노가 점점 커져서 다른사람을 상처줌을 통해 결국 자신이 상처받는 결과를 초래하게 된 것이다. 분노란 사소한 것에서부터 시작하여 끊임없이 그것만 생각하고 집착하다가 점점 더 커져서 폭발하는 그런 위험한 것임을 보여준다.
어찌나 내 모습과 똑같은지. 내가 내는 분노는 정당하다고 친구들이, 직장동료들이, 가족이, 세상이 말을 한다. 심지어 같은 신앙인들도 공감을 하며 내 권리를 누리며 살지 않는 것은 이상하고, 너무 신앙적이고, 바보라는 생각이 들게끔 한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오롯이 하나님과 나밖에 믿을 게 없다. 내가 말씀을 지속적으로 읽지 아니하고 기도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기준은 점점 엷어져서 세상의 기준으로 물들게 될 것이다. 그리고 나는 여전히 대다수가 옳다고 여기는 세상적인 기준들에 의해 살아가면서 세상적인 행동을 하며 살아갈 것이다.
사울을 대했던 다윗이 생각난다. 미친 사울이 그에게 여러번 창을 날렸다. 그는 다만 피하기만 할 뿐 또다시 그의 자리에 나아갔다. 압살롬이 반역할 것을 알았음에도 그를 제거한 것이 아니라 다윗은 피하는 쪽을 택하며 자신의 손으로 피를 묻히는 것이 아니라 그의 적을, 하나님 손에 맡겼다. 세왕이야기, 그책에서도 말하다시피 다윗은 누구나 공가하는 충분한 정의가 있었으나, 그럼에도 그를 주장하지 않고 그 자신이 피하고 지는 쪽을 택했다. 나는 그동안 다윗을 어쩜 그렇게 쉽게 보아왔는지. 단지 일개 바세바를 범한 사건만 가지고 그를 쉽게 판단하고 비판했다. 그가 가진 인내, 그리고 그것을 실제 생활에서 적용하는 다윗이 심히 정상이 아닌 것처럼 보일만큼 대단해 보인다. 나의 현재 모습은 그의 보좌관 요압처럼 길길이 날뛰는 상태이다. 그 책에서 다윗이 말하길, '그가 날 죽이는 것이 내가 그의 방법을 배우는 것보다 낫소. 그가 나를 죽이는 것이 내가 그와 같이 되는 것보다 낫소'라고 하면서 복수하지 않으리라 다짐한다. 지금 내가 불만을 가지고 그를 미워하고 기회가 있다면 언제든지 행동으로 옮겨질 수 있는 '불만', '분노' 때로는 '정의'처럼 보이는' 씨앗을 품고 있다면 나도 훗날에는 그와 똑같은 인간이 되는 것일까. 하나님은 그렇다고 대답하시는 듯하다.
이분법적 사고 : 자, 지금부터는 선교할 시간
여기에 나오는 선교사를 보면 이분법적 사고가 보인다. 그가 자신의 권리와 의무를 구분 짓듯 생활이 선교가 아니라, 자신의 생활과 선교를 구분짓는다. 이분법적 사고에 길들여진듯하다. 헬스클럽에서 하는 것은 운동이며, 일반 거리를 걷는 것은 운동이라고 생각지 않는다. 교회와 세상을 구분짓고, 교회만 들어가면 사람이 change된다. 즉, 지금부터는 신앙인이니, 단기선교, 아웃리치, 동역자들을 돕는데 힘쓸것이다라는 생각을 가진다. 그러나 다시 세상으로 돌아와서는 하나님의 법칙으로 살다간 먹히기 쉽기 때문에 그것을 모른체하며 세상에서의 법칙을 따르며 survival 경쟁에 참여한다. 이런식의 사고를 하게된 이유가 무엇일까 곰곰 생각해보니, 목적/일 중심의 사고가 어느정도 기여하는 듯하다. 선교사는 선교의 목적을 '섬김'이 아니라 '의료사역'에 두었고 그에따라 그는 선교사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하고있다고 생각했다. 나의 경우를 살피면, 아웃리치/단기선교의 목적을 '그나라에 대한 섬김과 복음전파'로 볼 경우, 같이 가는 동역자들은 목적을 이루기 위한 요소로 간주하여 그들에 대해서 역시 같이 섬겨야하는 사람들이란 것을 잊게되는 우를 범한다. 직장도 마찬가지로, 이전에 직장을 사역지로 생각하고 '일과 사람들을 변화시켜야지' 하는 비전을 가졌었나보다. 그러나 행태를 보면, 내가 직장의 목적을 '섬김'이 아니라 '일'에 둔 것이 확실하다. 선교사처럼 '섬김'은 내 머리안에 있고, 일은 실제 현실에 있어 이 둘이 융합이 안된 상태이다. 그래서 내 일상생활, 직장생활이 선교가 되지 않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간단하게 풀이될 수도 있을 듯하다. 내 인생의 비전을 '섬김 & 전파"로 삼는다면 당연히 일은 2위자리로 밀려나게 될 것이다. 문제는 비전을 남들 하는대로 그럴듯하게 만들지만 내가 사실은 그럴 마음이 없다는 것과 여전히 세상적인 욕심을 손 안에 쥐고 놓지 않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요즘 한손에는 불만을 다른 손에는 육체적 편함을 쥐고 있던 것을 슬쩍 놓아보려고 한다. 다윗처럼 나를 세우신 이도 하나님이요. 폐하실 이도 하나님이라고 찬양하며 담대함과 인내를 가질 수 있도록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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