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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2월 15일 화요일

로마인 이야기 14 - 그리스도의 승리

<책속에서>
페르시아 전쟁에 동행한 살루티우스는 율리아누스처럼 이교도이고 철학서를 쓰는 교양인일 뿐만 아니라 기독교도한테도 평판이 좋은 사람이었다. 누구에게나 공정하고 매사에 사려깊은 사람이라는 것이 중론이었다. 그런데 이런 사람한테서 흔히 볼 수 있는 일이지만, 공정하고 사려 깊게 행동하려고 애쓰는 나머지 직언하지 않는다. 아무도 비판할 수 없는 공정한 태도로 율리아누스 황제를 대하지만 단지 그것 뿐이다. 이런 인물은 항상 결단을 내려야 하는 처지에 있는 사람이 믿고 의지할 만한 인물이라고는 말할 수 없었다 - 율리아누스가 샤프르 왕이 지배하고 있는 페르시아 원정에 나설 때 -

야만족의 약탈과 국가의 중과세에 협공당한 농민의 생활은 고달파질 뿐이었다. 그들은 결국 독립보다 보호를 선택하게 된다. 농민이 농노로 바뀐 것이다. 고대의 기간 산업은 농업이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농민은 로마 사회의 중견층을 형성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라쿠스 형제도 율리우스 카이사르도 농지법에 집착했다. 중간층이 확립되지 않은 인간 사회는 불건전할 뿐만 아니라 제대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 테오도시우스 황제가 야만족(게르만족) 이주를 로마국 내로 공인했을 때 -

순교는 문자 그대로 자기가 믿는 종교에 목숨을 바치는 행위이고, 믿음을 지키기 위해서는 죽음도 사양하지 않겠다는 결심이다. 21세기가 된 지금, 가장 일신교다운 일신교도는 기독교도가 아니라 이슬람교도 쪽에 많다. 자폭테러가 어느 쪽에서 더 자주 일어나고 있는지만 생각해보아도 그리스/로마 종교를 믿는 사람들 가운데 순교자가 나오지 않은 이유를 알 수 있지 않을까? - 테오도시우스 황제시대에 그리고 주교 암브로시우스가 활동할때 그리스/로마 종교가 완전 사교가 되었을 때 -

제1부 콘스탄티우스 황제 시대(서기 337~361년)
제2부 율리아누스 황제 시대(서기 361~363년)
제3부 암브로시우스 주교(서기 374~39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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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스탄티우스 황제는 우리가 세계사 시간에 배웠던, 기독교에서 좋아하는 인물가운데 하나인콘스탄티누스 황제의 아들이다. 그 밀라노 칙령을 공포한 자의 아들이다. 참고로 밀라노 칙령은 기독교도에 대한 탄압을 금지하고 로마인이 다신교를 인정하듯이 기독교도도 하나의 다신교로서 인정해라는 요지의 칙령이다. 즉 기독교만이 진리이다라는 것을 의미했던 것은 아니다.
시오노 나나미의 해석으로는 콘스탄티누스가 황제에 오르던 시절엔 사실 수많은 황제들이 군사 반란 등으로 살해되었던 그리고 정국이 불안정했던 시대였다. 따라서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인간이 황제를 옹립하는 것이 아니라 황제의 권위는 신으로부터 온것이라는(마치 이집트 왕권확립처럼) 것에 대한 강조를 통해 정국 안정, 황제의 권위 안정을 꾀하고자 밀라노 칙령을 내린 것이라고 한다. 바울이 말했던 바와 같이 지상의 모든 권위는 인간으로부터가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기 때문에 권위에 복종하라고 한 기독교의 교리는 정확히 그가 추진하고자 하는 바와 일치했다.
이러한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세 아들을 두나, 첫째, 셋째는 일찍 죽어버리고 그리고 둘째 콘스탄티우스만 남게 되어버린다. 이 인물은 그런 혼돈의 시기를 보내어서 였을까? 통치기간 중에 오로지 정적 숙청에만 열올린다. 이를 통해 결국 뛰어난 친인척들이 그의 손에 살해되고, 후반엔 그 넓은 로마제국을 혼자 통치하지 못하면서 결국 20여년간 유배시켰던 율리아누스를 찾아내 정치에 등단시킨다. 또한, 이 인물은 뛰어난 군사적 재능이 있었던 것도 아닌 지라 그가 동방을 통치할때 페르시아 왕 샤푸르에게 아미다 함락을 당하고 만다. 이를 통해 메소포타미아 북부 지방을 고스란히 페르시아에게 넘겨주게 되고 말이다. 군사적/인격적/지도자적 재능은 없지만 숙청의 힘일까? 그는 꽤 오래인 24년간 제국을 통치한다.

율리아누스 : 일개 철학도에서 황제로의 변신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이복동생인 율리우스 콘스탄티우스의 아들이다. 율리아누스 아버지 그리고 형도 콘스탄티우스에 의해 살해되었다. 따라서 그는 눈에 띄지 않으려 하면서 숨죽이며 그의 청소년기를 살아올 수 밖에 없었으리라. 그가 그리스-로마 철학에 심취한 것은 일종의 탈출구가 아니였을까.
그러나 그에게 제국의 서방을 통치할 기회가 찾아온다. 이번만큼은 동방에 메여였는 콘스탄티우스도 이미 남아있는 친인척이 없기 때문에 서방을 통치할 누군가가 절실히 필요한 시점이라, 그의 아버지 또는 형처럼 그리 쉽사리 죽일수는 없었으리라.
그는 라인강 내의 갈리아(지금의 프랑스)에서 꽤 잘해주었다. 군사경험이 전혀 없음에도 게르만족을 맞아 고작 1만여명 정도의 군사로 잘 싸워주었다. 고작 20여세의 나이로 군사경험도 전무했던 그가 황제로서 어떻게 제국을 통치하고 적을 맞아 잘 싸워주었을까? 난 두가지를 생각해보았는데 첫번째로는 그가 공부해왔던 철학이 도움이 되지 않았을까? 철학이 지금은 살아가는데 있어 별로 중요치 않아보이지만, 당시엔 엘리트들의 필수 코스라. 또한 스토아철학 같은 경우는 현실세계와 밀접한 실용주의적 관점을 주기도 하므로 일조를 했으리라 생각된다. 즉, 깊은 사색을 통해(speculation) 통찰에 이를 수 있고 이것이 그가 정치를 하는데 있어 심안을 주지 않았을까? 두번째는 그의 젊음과 열정, 그리고 담대함이다. 그가 콘스탄티우스의 눈치만 보거나, 동방의 황제의 의사를 오버 짐작하면서 정치를 했다면 이러한 좋은 결과는 나오지 않았을것이라. 이미 모든 것을 잃어버린 더이상 잃을 것이 없다는 것은 그에게 담대함을 주어 그의 철학을 확고히 밀고나가는데 힘이 되어 주었으리라.
하지만, 이것은 갈리아에서 한시적으로 효과를 발휘한다. 기본이 단단하지 못해서일까? 콘스탄티우스가 죽은 후 제국의 황제에 오른 뒤 곧바로 치른 페르시아와의 전쟁에서 그는 병참을 확보하지 못하고, 적절한 전략을 사용하지 못함으로써 패배한다. 그리고 그 싸움터에서 전사한다.
20여년을 콘스탄티우스 밑에서 유배생활을 하다가, 겨우 황제가 되었는데 2년만에 어처구니 없게 죽어버렸다. 그의 치세동안에는 그리스-로마 종교의 부활을 꿈꾸면서 이러한 종교에 대한 지원 정책을 만들었다. 그러나 이러한 정책은 그가 죽으면서 끝나버렸고, 이를 통해 그는 기독교측에서 '배교자 율리아누스"로 불리기도 하였다. 그가 기독교 배교 정책을 계속했더라면, 오래살았더라면 지금처럼 기독교가 확산되지는 않았을거라한다.

암브로시우스 주교
이 사람은 순전히 정치적인 사람으로 보인다. 그는 결국 주교가 황제보다 높아질 것을 예상했을까. 그러고서 주교직을 받아들였다면 정말 천재이다. 시오노 나나미가 언급했다시피, 이 사람은 일생을 통해 그리스도 신앙인으로서의 면모는 보기 어렵지만, 개인의 신앙과는 상관없이 그는 그리스도교를 확산하는데 확실히 일조를 한 인물이다. 다만 그 목적은 신앙자체가 옳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몸담고 있는 교회 세력의 확산을 위한것으로 보이지만 말이다.
이러한 확산이 열매를 맺었는지 황제는 한마리의 양으로, 주교는 양을 인도하는 목자(양치기)가 되어 황제를 컨트롤 한다. 황제 테오도시우스에게 그가 지은 죄를 사죄할때까지 교회 출입금지를 시킨것이 일례이다. 이 사건은 700년후엔 카노사의 굴욕으로 황제가 주교의 사죄를 바라면서 사흘밤낮을 눈발속에 용서를 빌었던 것에 대한 전조이고...
기독교를 종교로 인정한 그리고 이러한 신의 권위부여를 이용하여 정국안정을 꾀했던 콘스탄티누스는 이런 결말을 예상했을까? 신으로부터 권위를 부여받는다는 것은 결국 신의 대리인인 주교(목자)가 황제보다 더 높아질 수 밖에 없음인데 결국 그가 만든 덫에 그의 후손들이 걸려들어버린것이다.

한가지 짚고 넘어갈 것은 평범한 일개 그리스도인인 로마시민은 잡다한 신변사에 대한 상의/축복을 바라는 데 하나님이라는 신을 대하는데 어려움을 느끼게 되었다. 이전에야 로마의 수많은 신들가운데 하나 '부뚜막 신'이라던지에게 기도를 했다면, 그리스도교이후엔 이러한 일을 하나님 이라는 대단한 신에게 논의하는것을 어려워한 것이다. 이러한 정서 또는 문제점을 해결키 위해 암브로시우스 주교가 하나님 이외에도 마치 잡다한 로마의 신들처럼 '친근한 용도'의 수많은 성인들을 배출해냈다는 것이다. '큰일은 하나님에게 신변잡사는 성인들에게' 란 기치를 걸고..
결국 이는 너무 많은 성인들을 배출해내어, 일년 365일 특정 성인의 날이 아닌 날이 없자 축일을 할당받지 못한 성인들을 위해 11월 1일 만성절을 만들어냈다고 한다. ㅎㅎ

또한 주교는 하나님=예수=성령을 동등히 여기는 삼위일체파(후에 카톨릭파)였고 이에 대등하게 싸우던 아리우스파(예수는 한없이 인간에 가깝지만 인간은 아니고, 신에 가깝지만 신은 아님)를 궤멸하는데 앞장섰다. 시오노 나나미의 해석에 따르면 그가 교리를 해석한 후에 삼위일체가 옳기 때문이 아니라 단지 그가 삼위일체파에 속해있었기 때문에 그의 교세를 확장키 위해 아리우스파를 이단으로 몰아 섬멸한것이라고 한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을 보면 이와같은 생각들이 든다.
1. 사람들은 일부러(intentionally) 자신의 편한대로 또는 생각없이 현상을 해석한다. 밀라노 칙령의 본 뜻은 황제의 권위 강화에 있었는데도, 사람들은 기독교인의 승리라고 자축한다. 다른 얘기같지만 요즘 전세값이 치솟고 있는데 정부는 전세금 융자를 기존에 6000에서 8000까지 확대시킴으로써 안정시킨다고 대책을 내놓았다. 전세 시장을 안정시킨다는 것은 비정상적으로 높이 치솟는 전세금으로부터 수요자를 보호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정부의 대책은 빚내서 전세를 얻으라는 결국 높은 전세값을 그대로 유지시키거나 또는 오히려 encouraging 함으로써 전세 불안정을 유발하고 그리고 공급자만을 보호하기 위한 대책을 내놓았다. 이를 보면 대책을 세우는 사람들이 현상을 stupid 해서 이해를 못하거나 또는 일부러 pretending stupid 함으로써 기득권의 이익을 보호하려는 정책을 취한 것으로 보일뿐이다.

2. 만약(what if )
아리우스파가 암브로시우스 주교에게 먼저 접근했더라면 그리고 그를 그들의 주교로 만들었더라면? what if 율리아누스가 좀 더 오래살았더라면 그리고 그의 그리스/로마 종교 부활과 맞물려 그리스도교 감소정책을 지속적으로 추진했더라면?

인간은 그들의 이익을 위해 일을 추진하고 이를 통해 역사의 방향성이 변한다.
이러한 현상을 믿지 않는 사람들 입장에서 이것을 '시대의 흐름' 또는 '우연'이라고 부르고
그리고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뜻'이 역사속에서 이루어지고 있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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