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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2월 2일 수요일

성자 프란체스코 1 - 니코스 카잔차키스

(책속에서)투쟁적인 기독교도의 진가는 그가 지닌 미덕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면에 도사리고 있는 오만과 불경과 불충과악의 같은 것을 미덕으로 바꾸려는 치열한 투쟁으로부터 나오는 것입니다.

프란체스코야, 프란체스코야, 너는 이렇게 살려고 태어났니? 노래하고 즐기고 여자나 꾀려고?

우리는 때때로 많은 것을 원합니다. 내가 이의를 제기했다. 그 모든 것중에서 어느 것이 하나님의 뜻인가요?
- 가장 어려운 것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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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읽어보는 소설이다. 요즘 하도 경제 관련 서적이나, 기독교도 서적, 설명문 형식의 책만 읽다보니, 처음 책을 폈을때 소설 문체가 좀 낯설었다. 뭐랄까. 업무에서도 그렇고 정보전달에 대한 빠른 캐치를 중요시 여기다보니, 소설에서의 디테일한 묘사를 보면서 이걸 읽어야 하나 라는 생각이 들면서, 이러한 부분을 읽어가는 느긋함을 잃어버렸달까.


그리고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소설이다. 그는 내가 고등학교 때인가, 대학때인가, '그리스도 최후의 유혹'을 통해 알게된 작가이다. 그때 크리스챤이 아니었음에도 그 책을 보면서 펑펑 울었던 기억이 난다...나중에야 그가 '희랍인 조르바'라는 책으로 유명한 작가란 걸 알게되었다... 그의 책들은 구하기가 쉽지는 않아보인다. '그리스도 최후의 유혹'도 이번에 구하고 싶었으나, 없었고..그의 책들을 보면, 위에 언급한 책들 그리고 수난 등과 같은 기독교 관련 책들이나, 그리고, 돌의 정원이나 희랍인 조르바 처럼 그리스 역사에 관한 책들 두 부류로 주로 나누어 보인다.

성자 프란체스코는 그의 일대기를 소설로 엮은것으로 어떻게 그가 부유한 젊은 청년에서 '아시시의 성자 프란체스코'로 되는가를 보여준다.

그는 절대 빈곤, 절대 정결, 절대 사랑을 주장한다. 그러한 그를 보고 찾아온 많은 사람들은 그러나 그의 이런 정신에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으려는 것 자체가 교만이다' 또는 '예수님도 성전앞의 장사치를 쓸어버렸다. 예수님은 이 세상을 심판하러 오셨다는 등의 말을 인용하면서 사랑이 아니라 전쟁을 해야한다'고 주장하거나 또는 '세상은 사악하다. 우리는 세상과 분리된 곳에서 악한 세상을 위해 기도를 해야한다' 등의 제각기 다른 주장을 펼치면서 분란이 일어난다.
프란체스코는 좁은 곳에 이렇게 많이 모여있는 것 자체가 분란을 일으킨다면서 각기 세상을 향해 나아가라고 하면서 1권을 마친다.

1. 하나님은 사람마다 다른 형식으로 나타나신다.
난 프란체스코를 보면서 참 신기한 생각이 들었다. 하나님은 왜 그를 선택하셨을까? 어렸을 때부터 남들보다 더 기독교적으로 충분히 교육을 받은 것 같지도 않고. 뭔가 특별한 자질이 보인것 같지도 않은데. 이것을 보면 하나님의 나타나심은 사람이 바라보는 자질에 있지 않음을 알수 있다. 또한, 그는 며칠을 하나님과의 싸움을 통해 죽다 살아났다. 그리고 개과천선해 버린것이다. 어찌 그는 그리 순순히 하나님을 따를수 있었을까? 그는 조금의 의심도 없이 철저히 따른다. 그가 부모를 버렸을때도, 이성적인 생각으로는 굳이 그렇게 까지 해야했을까.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말하면서 부모 가슴에 대못을 받는 것이 정상인가 란 생각이 들었다. 하루아침에 변해버린 아들을 바라보는 아버지입장도 이해해 주면 안되었을까? 물론 하나님은 부모를 버리라는 것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일에 프란체스코의 하나님에 대한 순수한 마음을 요구하기 것이 초점이란 것을 안다. 그리고 그러한 순전한 마음이란 타협을 통해서 나오는 것이 아니고..이것을 보면 난 참 쉽게 신앙생활을 하는구나를 느꼈다...

그리고 내게 하나님이 이런식으로 나타난다면, 난 아마 정말 하나님일까 부터 시작해서 끊임없이 의심을 하거나, 처음의 충격이후에는 순수하게 완전히 따르는 것이 아니라 점점 흐지부지 되면서 초심을 잃게 되지 않았을까?

2. 절대 빈곤은 교만인가? vs. 어느 정도의 재산에 대해 관대한 분위기의 현대 사회
우리는 재산을 쌓아둔다. 인간의 마음은 연약해서 혹시나 모를 위험에 대비하여(so called '보험') 미리미리 준비해둔다. 현명한 처사인것 같으나, 다른 한편으로 생각하면,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재산을 의지하고 더 믿는 모습으로 볼 수도 있다. 만약 우리가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산다면, 우리는 철저히 하나님을 의지하게 되지 않을까? 내일 먹을 양식에대해, 건강에 대해, 가족에 대해...
쌓아두지 말라고 말라고 예수님은 계속 말씀하시는데, 우리는 '이런 불확실한 세상에 미래에 대해 대비하는 것이 왜 나쁜겁니까?' 합리화 하면서 계속 말씀에 반박하고 또 그것이 지혜로운 처사로 생각한다.
프란체스코 주장은 차암 어려워 보인다. 내게는.. 천국에 들어가는 이렇게 어려운데, 우린 기준점을 너무 느슨하게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자문해 본다.

<작은 새들에게 설교하는 아시시의 성 프란체스코, St. Francis of Assisi - Liszt from youtube>
- 노다메 칸타빌레에서 노다메가 랑베르 부인의 모임에서도 이 곡을 연주했지비..정말 음악이 이런 느낌인지 궁금했는데....이러한 장면을 연상하면서 들으면 또 그렇게 들린다. 부산스럽게 날개를 움직이면서 모여드는 참새, 제비, 비둘기들, 그리고 모인 그들에게 하나님을 설교하는 프란체스코, 그리고 마지막으로 다들 함께 하나님을 찬양하는 모습...
리스트의 피아노곡 : http://www.youtube.com/watch?v=X5ScaaDk8gw

댓글 1개:

  1. 잘 봤습니다. 1월 30일 개봉하는 '그리스인 조르바' 작가의 전기영화 도 추천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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