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ure 한것을 찾을려구 한다는 것이 욕심 아닌가? 비록 관습이나, 살아온 환경, 유전적 배경에의해 영향을 받은 결정이면 어떠하랴. 그것이 내 욕심이 들어간 것이 아니라 옳기 때문에 그 일을 한다는 것 자체에 이미 결함을 내포하고 있지 않은가. 그 옳다는 판단 역시 사람마다 다를진대 옳다는 인식 자체에 이미 나의 삶의 경험, 환경 등이 영향을 미치고 있지 않은가.
우리는 흔히 자유를 내가 원하는 것을 하고, 내 욕구를 방해받지 않고 추구할 수 있는 상태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칸트는 애초에 그러한 욕구를 직접 선택하지 않았다면, 그 욕구를 추구한다고 해서 어떻게 자유롭다고 할 수 있겠는가? 라는 문제를 제기한다. 즉, 내 의지가 내 외부에서 결정된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자유가 내 욕구와 끌림을 따르는것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면 그것이 어떻게 가능할까? 내가 하는 모든 행동은 외부 영향으로 결정되는 욕구나 끌림에서 나오지 않던가? 칸트가 관찰하기로는 '자연의 모든 것은 법칙에 따라 움직인다' 자연스러운 필요 법칙, 물리법칙, 인과법칙 등, 여기에는 우리도 포함된다. 우리도 어쨌거나 자연의 존재니까. 인간이라고 자연법칙에서 예외될 수 없다. 칸트의 답은 이성이다. 만약 이성이 우리 의지를 결정한다면 그 의지는 자연이나 끌림의 명령에 구애받지 않는 선택의 힘이 될 수 있다.
오늘날 성도덕 논쟁에서 자율권을 중시하는 사람들은 개인은 자기 몸을 자기 마음대로 이용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칸트에 따르면, 우리는 어떤 식으로든 우리 몸을 마음대로 이용할 수 없다. 즉 자신을 대상으로, 단순한 수단으로, 이익을 위한 도구로 여겨서는 안된다. 매춘을 예를 들자면, 이것은 이익을 바라고 내 몸을 다른 사람의 성욕 충족에 이용되게 하여 자신을 수요의 대상으로 만드는 행위라고 한다. 이것은 합의한 성인들끼리의 행동이라도 인간의 존엄성과 자기존중을 거스르는 행동에는 반대한다. 자유로운 성관계가 두사람에게 만족을 준다해도 두사람은 상대의 인간성을 욕보인다. 이들은 인간성을 욕정과 끌림을 충족하는 도구로 이용하기 때문이다. - 182p <섹스, 거짓말 그리고 정치>
칸트에게 도덕은 결과가 아니라 원칙의 문제이다. 따라서, 화이트 라이조차 그에게는 용납되지 않는다. 예를들어 친구가 당신 집에 숨어있고 살인자가 문앞에 와서 그 친구를 찾는다면 칸트에 따르면 진실을 말해야 할 의무는 결과에 상관없이 항상 유효하다.
칸트에게 중요한 것은 동기다. 그에게 도덕은 결과가 아니라 원칙이며, 그에게 자유는 순수이성의 실천이다. 그에게 공리주의란(최대다수의 최대행복) 기본권 결정에 결코 끼어서는 안되는 것이다. 행복이란 저마다 견해가 다르기 때문에 특정한 행복을 헌법의 기초로 삼는다면 어떤 사람은 자신의 행복의 가치를 포기하고 다른 사람의 가치를 받아들여야 하기 때문이다.
지금은 자유지상주의 논리가 판을 치고 있다. 이것이 자신을 소중하게 여기고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내가 내 몸을 합의해서 하는데 당신이 무슨 상관이냐고 한다. 그렇다면 자신의 쾌락을 위해서는 어떠한가? 이것도 칸트는 반대한다. 물론 pure 할 수는 없겠지만 인간성을 존중하면서 동시에 쾌락을 추구할 수도 있다. 왜 그렇게 칸트는 pure perfection 을 imperfect human 에게 요구하는가? 어느누가 아무것에도 구애받지 않고 pure rule by reasoning 이성에 의한 순수한 자율적 규칙을 만들어 적용할 수 있단 말인가?
이글을 읽으면서 참으로 이상타 생각했다. 최대다수의 행복을 위해 소수가 희생해야한다는 것은 당연시 받아들인다. 그러나 아이러니컬하게 헌법에는 각 인간의 개별 행복권을 추구할 수 있다는 등의 개인의 자율적인 가치가 존중시되고 있다. 공리주의와 개별인간의 행복추구권 모순되는 개념아닌가?
우리는 지금 자유지상주의가 판을 치는 세상에서 살고 있다. 자신이 생각하고 자신이 하고자 하는대로한다는 개념은 얼핏보면 칸트가 주장하는 모든 사람은 목적으로서 존중받아야 한다는 개념과 비슷해 보인다. 그러나 둘 사이의 차이는 자유지상주의가 무분별하게 모든것에 자신을 허가한다면, 칸트는 자신을, 인간을 수단으로서 행하는 모든 행동에는 반대해야한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한때의 고통을 피하기 위한 수단으로 자살을 택하는 것을 허용치 않는다.
무지의 장막은 원초적 위치에 필요한 힘과 지식의 평등을 보장한다. 누구도 상대의 사회적 지위, 상대의 장단점, 상대의 가치와 목적을 모른다는 점을 보장함으로써, 하다못해 무의식으로라도 거래의 우위를 차지하는 사람이 없도록 한다.(롤스의 평등 원칙). 그는 정의를 능력 위주 개념으로 이해하는 것은 자유지상주의 개념으로 이해하는 것과(비록 정도는 약할지라도) 똑같은 이유로 문제가 된다고 결론 내린다.
마이클 조던을 보면, 그는 연습을 열심히 했다. 하지만 그보다 못한 선수 중에는 그보다 더 열심히 연습하는 선수들도 있다. 그들이 조던보다 더 높은 연봉으로 계약할 자격이 있다고 말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우리가 기여한 것들은 어느 정도는 공을 내세울 수 없는 타고난 재능에서 나온다.
그렇다면, 어떤 주자가 다른 주자에 비해 빠르다는 사실이 마음에 걸린다면, 그 빠른 주자에게 납덩이 신발이라도 신겨야 하는가
그가 주장하는 차등원칙은,, 사람들의 타고난 재능을 공동자산으로 여기고, 그 재능을 활용해 어떤 이익이 생기든 그것을 공유하자는데 사실상 동의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노력을 인정해주어야한다는 말을 많이 한다. 노력해서 그만큼 벌기 때문에 그들의 몫이라고 말한다(자유지상주의). 그러나, 롤스가 말한대로, 똑같은 노력 또는 심지어 더 많은 노력을 하는데도 우리는 노력한 만큼의 결과를 받지 못한다. 즉, 어느정도 타고난 능력때문이다. 이것을 개인의 자산이 아닌 공동의 자산으로 여기고 그들은 사회에 기여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나는 한번도 노예를 소유한 적이 없다'고 하면서 과거에 자신의 조상이 무슨 짓을 했건 그것에 대한 책임을 질 필요가 없다는 개인주의적 시각을 보인다. 매킨타이어는 이러한 '나는 사회적/역사적 역할과 지위와는 별개의 존재'라는 생각이 잘못이라고 한다. 우리에게는 우리가 선택하지 않은, 그리고 사회계약의 결과로도 돌릴 수 없는 도덕적 의무가 있지는 않은가? <우리는 서로에게 어떤 의무를 지는가?>
예전에 고려, 조선시대를 보면 연좌제라는 것이 있었다. 반역을 하면, 3대를 멸한다고 했을때, 아무상관도 없는 아이들까지 말살하는 것을 보며 참 잔인하다, 불공정하다는 생각을 했다.
미국에서 노예에 대한 보상금 지급을 지금 얘기하면, 현세대들은 자신들이 그러한 짓을 하지 않았는데, 내 조상이 지은 죄때문에 내가 왜 책임을 져야하느냐고 타당한 논리를 세운다.
뭐, 나도 당연하다고 생각해왔다. 그러나 책을 읽으면서 한편으로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라는 존재가 그냥 홀로 고고이 지구상에 떨어졌는가? 그리고 혼자서만 살것인가? 살아갈 수 있는가?
아니다. 나라는 존재는 역사, 지역, 부모, 경제에 영향을 받고 영향을 주는 하나의 장대한 스토리에서 줄기를 만들어가는 서사적인 존재이다. 뭐, 일예로, 노예제를 보면, 현세대의 나는 내 책임이 아니기 때문에 내가 낸 세금으로 보상을 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주장하지만, 현세대의 나는 앞선세대에 의해 만들어졌다. what if 나의 할아버지가 노예의 노동력을 착취하여 부를 쌓고 그리고 내가 태어나 풍족하게 살 기반을 만들었다면 어쩔 것인가? 그래도 영향을 받지 않았다고 주장할 것인가? 단순한 시각에서는 타당해 보이지만, 장기적 시각에서는 아닐수도 있지 않은가?
공리주의는 정의를 최대다수의 행복추구에 기여하는 것이라 하고,
- 그렇다면 옳을 수 있는 소수는 무시되고
칸트는 정의를 순수한 이성에 의해 판단된 것이라 하고
- 순수 이성이란게 만들어 질수 있을까 의심되고,,
롤스는 정의를 모든 내적/외부적 환경을 배제한후 결정해야하는 것이라하면서 타고난 능력은 공동을 위해 기여해야한다고 하고,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의를 목적이 선하면 정의라고 한다.
- 그렇다면 선한 목적이란것은 사람마다 다르다는 것이 문제되고.....아리스토텔레스는 노예제도를 옹호했는데, 그에 대한 이유로 든것이 노예는 노예가 되기 위해 태어났으며 그들은 노예상태일때 자연스럽고 편하게 느낄 것이다(목적)는 식의 논리를 주장하였다.
자유지상주의자들은 정의를 합의, 그리고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다는 범위에서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는 것 이라고 한다.
- 합의라는 것은 대부분이 그렇듯이, 동등한 상태에서, 서로가 똑같은 만족을 느끼지는 않는다. 능력이 더 뛰어난 사람은 더 많이 가질 것이며, 부족한 사람은 어쩔수 없는 처지에서 합의를 할 수 밖에 없을 때도 있다. 이런것을 서로 합의 했으니까 공정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난 자유지상주의를 주장하였으나 지금은 롤스의 의견이 가장 공감이 가고 정의의 이상에 맞아보인다. 다른 주장들은 그 안에 대부분 내재적이든 외부에서 오는 것이든간에 어쩔수 없는 불평등을내포하고 있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롤스는 그러한 어쩔수 없는 불평등을 개선하려고 노력한점에서 정의에 좀 더 근접하다고 생각된다.
'자연의 분배 방식은 공정하지도, 그리고 불공정하지도 않다. 인간이 태어나면서 특정한 사회적 위치에 놓이는 것 역시 부당하지 않다. 그것은 단지 타고나는 요소일 뿐이다. 공정이나 불공정은 제도가 그러한 요소들을 다루는 방식에서 생겨난다' by 롤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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