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를 게을리 하고자 하는 유혹이 들고 또 그렇게 해도 아무 상관없을 것이라는 섣부른 결론이 머리속에 떠오른다. 기도를 게을리 하는 것과 나의 믿음은 서로 상관이 있을까? 나의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마음이 흔들린다.
하나님은 노아에게 '모든 생물을 다시 멸하지 않으리라' 약속하셨다. 하나님이 스스로 자기 자신을 제한했다고 하는 사실이다. 이 세상의 모든 악은 하나님께 대항하는 원수들이다. 그런데 이 하나님이 세상의 악함을 일시적으로 참겠다는 약속을 하셨다. 아니, 그것은 하나님이 이제는 다른 방법으로 악의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약속이었다.
고난과 고통에 대해서 올바른 영적 반응을 알고 싶으면 예수님이 자신의 고난과 고통에 어떻게 반응하셨는지 살펴보면 된다. 주님은 고민하셨고, 근심하셨으며, 눈물을 흘리셨다.
인내는 그저 어려운 일을 참는 능력뿐만이 아니고 역경을 영광으로 바꾸는 능력입니다.
요한계시록 12장은 욥기보다 더 이상한 대결을 보여주고 있다. 해를 입고 열두 별의 면류관을 쓴 아이를 밴 여인이 붉은 용과 맞서고 있다. 이 붉은 용은 어찌나 큰지 그 꼬리로 하늘의 별 3분의 1을 끌어다가 땅에 던진다. 이 용은 여인이 해산하는 아이를 삼키고자 기다리고 있다. 그런데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여인이 광야로 도망가고, 뱀은 그녀를 물에 떠내려 가게 하려고 하며, 천상에서는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고 있었다. 이것은 예수님이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실 때 천상에서 있었던 대혼란을 이야기하고 있다. 한 아이의 탄생이 온 우주에 대혼란을 가져오게 했다.
거대한 우주속에 먼지 같은 한 인간이 이 온 우주의 역사에 어떤 영향력을 행사할 것이라고 믿는 일은 어리석은 일인가?
세상이 완전히 공평하다고 하는 논리를 내세우려면 믿음의 비약이 필요하다.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이러한 불공평한 현실을 전적으로 부정하기보다 축소하려고 한다. 그래서 욥의 친구들처럼 고난 뒤에 무엇이 숨겨져 있는지 찾으려 한다.
"하나님은 당신에게 무엇인가 가르쳐 주려고 합니다. 쓴 마음을 품기보다 특권이라고 생각하십시요. 하나님을 의지하는 법을 배울 수 이는 기회입니다"
"당신은 지금 훈련 기간을 통과하고 있습니다. 믿음의 새로운 근육을 연습할 수 있는 기회입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하나님은 당신이 감당할 수 없는 시험을 허락하지 않으십니다."
욥의 친구들은 바로 이러한 지혜로운 말을 한 셈이었고 모두 틀린 이야기는 아니었다. 그렇지만 욥기는 이 충고가 고통을 받고 있는 사람들의 질문에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 충고는 잘못 처방된 약과 같았다.
이러한 불공평의 문제를 설명하는 다른 방법이 있다. 욥은 모든 설명을 들은 뒤, 이렇게 한 문장으로 결론을 내렸다. '인생은 불공평하다' 이것은 인생에 대한 어떤 철학적인 말이 아니라 인생에 대한 고찰에서 나온 이야기다. 그래서 이 말은 고통속에 있는 사람들의 마음을 대변하고 있다. "왜 하필 나인가?", "내가 무엇을 잘못했기에 이렇게 되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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