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발은 진실에서 출발했으나 그 진실이 시간의 흐름에 따라 제도화되고 교리의 껍질을 쓰게 되면서 처음의 진실은 약화되고 껍질은 더욱 두터워진다. 그 껍질은 다시 인간을 구속하게 되어 인간해방의 신앙은 결국에는 인간구속의 종교로 변질된다. 예수는 억압받는 영혼들에 대한 사랑을 가르쳤으나 오늘의 교회는 교리를 수호하고 교회기구를 발전시키기 위해 인간을 잃어버리는 우를 범하고 있다.
진지하게 정직해야 한다. 임시방편으로 문제를 쉽게 해결해 버리거나 감상주의에 빠져서는 안된다
사람들은 항상 새 옷, 새 직장, 새 조직 등의 새로운 것을 찾지만 문제의 뿌리는 새로운 사람, 새로운 영혼이다.
김진홍 목사의 20-30대의 자서전적 이야기이다. 자신의 이야기인데 좀 더 떨어져서 자신의 모습을 묘사하는 것처럼 보인다. 마치 소설처럼 이야기를 풀어나가서 재미났다. 또 한가지 마음에 드는 점은 사실 그대로를 더하거나 빼지도 않고 간결하게 묘사한 점이다. 소설의 절정을 만들기 위해 감정을 꼭대기까지 이끌어서 독자에게 큰 감동을 주려는 듯한 허세 또한 없다. 예를 들면 그가 창녀촌에서 성경험을 한것을 있는그대로 드러낸 부분이 그렇다. 당시 목사는 아니였지만 나중에 목사일 때 이 책을 썼는데 그러한 부분은 뺄수도 있었을 텐데 넣었다. 또는 아픈 병자를 데리고 병원을 돌아다니다 그의 등에서 운명을 맞이한 가여운 여인을 묘사할때도 좀 더 과장하여 감정을 절정으로 이끌어 내지 않은 부분 등이다.
그는 철학과를 다녔고 졸업을 하고 이곳 저곳을 방랑하면서 약장수도 하고, 공장에서 노동자로 일하다가 노동자의 작업환경 개선을 주도하면서 회사와 대치하다가 쫓겨나고, 신학교도 다닌다. 이러한 방랑의 목적은 삶에 대한 확신이 없어서이다. 그러면서 그는 무엇인가를 위해 완전히 몰입하는 사람들을 부러워한다. 그가 예수쟁이가 되는 과정은 그러나 내겐 잘 와닿지 않는 부분이다. 그는 로마서를 읽다가 신학교를 가고 예수를 믿겠다고 하였으나, 단순히 로마서와 그의 예수에 대한 믿음과의 연계성이 미약하다. 이 부분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설명해 주었으면 좋았을것을. 왜 그가 예수를 믿을 수 밖에 없었는가에 대한 설명이 부족한듯 보인다.
그는 신학교에서의 이론/교리에 치우치는 점을 비판하고 거리로 직접 뛰어들어간다. 그래서 서울의 판자촌에서 전도사로서 빈민들을 돌본다. 처음에는 무턱대고 가난한자에게 돈을 주고, 주린 자에게 밥을 주고, 아픈자를 어떻게든 낫게하려는 데에 초점을 맞춘다. 그러나 결국 그는 깨닫는다. 새옷, 새집을 주는 것은 인간의 겉모습을 바꿀수 있지만, 본모습인 내면은 바꾸지 못함을. '사람이 떡으로만 살것이 아니요. 말씀으로 살것이라' 이후 그는 모든 것의 근본인 인간의 내재적인 모습을 주님의 말씀으로 바꾸는 것에 초점을 둬야한다는 생각으로 글을 마친다.
김진홍 목사는 책을 읽기전부터 많이 들었던 분이다. 특히 뉴라이트와 변절, 그리고 정치에 관심이 많으나, 필립얀시가 어느책인가에서 말했듯이, 사회부조리/희생되는 소수계층을 위한 정치가 아닌, 자신의 이익을 위한 정치를 하는 종교인으로 들어왔다. 그래서 사실 읽기 전부터 색안경을 끼고 본 것이 사실이다. 그래서인지 책의 서두 어딘가에 김진홍 목사 시절의 불합리한 사회, 그리고 기득권화된 교회 등에 날카로운 비판의식을 가지면서 초심을 강조한 그의 말이 좀 우습게 보였다. 그는 왜 초심을 지키지 못했을까? 삶의 여러 경험을 통해 그는 깨달으면서 한걸음씩 더 위로 올라가는듯해보였다. 그의 하나님에 대한 각성 -> 단순한 동정 등을 통한 빈민구제 -> 객관적으로 도움을 주려는 문제 해결의식 (빵을 주는 것이 아닌 빵 만드는 법을 가르쳐 주는) -> 예수님의 말씀으로만이 사람을 바꿀수있다는 생각 ... 이런식으로 그는 진보되는 듯했다. 그런데, 그런 그가 지금은 왜!! 그를 보면서 나도 그럴수 있겠지. 나도 나를 하루하루 조그만한 악을 허용하면서 결국 나중에는 커다란 악을 저지르는 것에 무감각해지겠지 라는 생각이 든다. 하루하루 나에게 오늘은 피곤하니 기도는 넘어가자, QT 는 넘어가자 하는 식으로 나를 봐주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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