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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6월 4일 목요일

기도의 전성기를 경험하라 - 이인호

[책 속에서]
우리가 기도하지 않는 게으름을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믿음처럼 포장하지 말아야 한다.
- 1부. 기도할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포시스는 "기도할 하나님께 말하거나 대화하는 것, 즉 다정한 어조로 대화하며 하나님과 함께 산책하는 것으로 축소시키지 말라. 우리는 기도를 영혼의 위대한 행동이기보다 대화로 만들려고 한다. 안기기 위하여 하나님의 두 팔에 자신을 던질 분 아니라 그와 겨루기 위하여 그렇게 하라. 그는 그런 거룩한 전쟁을 좋아하신다."고 했다.
- 2부. 응답받는 기도에는 법칙이 있다.


오늘날 하나님이 찾으시는 사람은 사람들의 악함에 분노하는 사람이나 사람들의 불순종과 연약함을 정죄하는 사람이 아니다. 사람들의 연약함을 이해하고 악함을 불쌍히 여기며 그들의 고난을 동정할 수 있는 사람이다. 당신에게 고통이 많은가? 지금 질병을 앓고 잇으며 파산과 실직의 고통을 당하고 있는가? 하나님은 당신의 그 아픔을 통해서 다른 사람을 위로하고 치유하고자 하신다. 당신의 고난과 상처는 다른 사람의 상처를 싸매는 치유의 원동력이 될 것이다.
- 4부. 기도의 하이라이트, 세상을 통치하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나는 악인이 죽는 것을 기뻐하지 아니하고 악인이 그 길에서 돌이켜 떠나 사는 것을 기뻐하노라.(겔 33:11)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죽을 자가 죽는 것도 내가 기뻐하지 아니하노니 너희는 스스로 돌이키고 살지니라(겔 18:32)


오늘날 정말 안타까운 현상이 무엇인가? 우리는 모두 처음에는 니느웨 사람 같고 죄인과 세리 같고 둘째 아들 같은 상황에서 용서받고 구원받아 교회의 성도가 되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요나처럼 되어가고, 바리새인처럼 되어가고, 맏아들처럼 되어서 교회안에 죄인들과 연약한 자들을 정죄하고 그들에 대해서 엄격해진다. 교회를 다닌지 한 30년쯤 되면 눈이 서치라이트가 되어서 죄를 적발해내는 데 전문가가 된다. 보통 장로님이나 권사님들이 무서운 이유다. 목사님들도 점점 무서워진다. 원래 신앙이 장성할수록 예수님을 닮고 용서의 사람이 되어야 정상인데 이상하게도 바리새인을 닮아간다.
- 4부. 기도의 하이라이트, 세상을 통치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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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나에게 기도는 부담감이다. 많이 발전한거다. 이전에는 '선택' 이거나 또는 해야되는 것은 알지만 바빠서, 피곤할 경우, 하지 않을 수도 있는 것이었다. 지금은 피곤하지만, 하고 싶지 않지만, 억지스레라도 해야하는 것이 되었다. 중보기도의 능력이라 생각된다. 나의 이러한 경건생활의 문제점을 오픈하고 여러사람에게 중보를 요청한 것이다. 그들이 기도를 열심히 해서인가 보다.


기도에 대한 내용도 slightly 바뀌고 그리고 앞으로 많이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 중심, 그리고 내 가족 중심의 복을 바라는 기도였다면, 지금은 사회가 사회인지라 이 사회에 대한 기도, 이 나라에 대한 기도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예수님이 오시기 전, 안나와 시므온은 메시아가 오시길 바라며 몇십년동안 기도를 해왔다. 우리시대의 그리스도인은 무엇에 대해 기도를 해야할까? 저자가 말한 바와 같이 지경을 넓혀서 새하늘과 새 땅이 이 땅에 임하도록 이 세상에 대해 적극적으로 기도해야 하지않을까?


천국은 죽음후 영혼이 하늘로 올라가는 거라고 막연히 생각했다. 즉, 기독교는 죽음 후를 대비하기 위한 것이라 생각했다. 이러한 사고의 이면에는 영과 육이 분리되고 선과 악이 영혼과 육체로 분리된다는 플라톤의 이분법적 사고가 어느정도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한국 교회의 일곱가지 죄악 中에서) 그러나, 주님이 약속하신 천국, 새하늘과 새땅이라는 것은 죽음 후 영혼이 천국에 가는 것이 아니라 이 땅에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한다. 우리가 새하늘과 새땅을 이땅에 만드는데 일조해야 한다고 한다. 따라서, 나는 개인차원뿐 아니라 이 사회의 부조리를 위해서 기도해야하지 않겠는가? 소극적인 자세에서 벗어나 주님을 supporter로 두고 기도와 함께 적극적으로 개선하기 위해 action을 취해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 것이 최근의 생각이다.


그러나 1년전에도 주제는 달랐지만 같은 생각을 했다. 그때 '아닌것이 아니라는 체념에서 벗어나 아닌것을 올바로 고치는 길에는 많은 수고와 노력이 필요하다면서, 나는 그런 고생을 사서 하고 싶지 않다'는 것으로 결론을 내렸었다. 다른 사람이 하면 나는 뒤에서 박수나 치겠다라는 생각을 했었다. 지금도 그러한 생각에서 조금도 변화되지 않았다. 그러나, 역시 미세하게 달라진 점이 있다면, 내 뒤에 주님이 계시기 때문에 그 길을 갈 수 있고 갈 수 있도록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자, 나는 지금 무엇을 해야할까? 우선 지경을 넓히어 나라와 민족을 위해서 기도를 하는 것 그리고 주님이 바꾸어 주실 것을 믿는 것이다. 그리고 단순히 감정적으로 내가 무엇인가를 하겠다고 하지 말고, 나의 관심사, 할 수 있는 여건, 등을 고려해 그 다음단계, action plan을 생각해 보자.


[플라톤의 사상]
ㅇ 플라톤의 사상 : 이데아=본질, 윤리, 고정적인 것 <=> 현상=운동하고 변하는 것 ==> 존재론적으로 이 우주를 설명함
ㅇ a certain 기독교 사상 : 영혼=불멸 <=> 육체=죄 ==> 세상은(몸) 일시적인 것이고 불멸의 영혼 추구
ㅇ 플라톤의 이원론적 사상은 역시 기독교의 이원론적 사고에(영혼은 불멸하고 죽음후에 천국으로 영혼만 가고 육체는는 죄성이 있으며 일시적임) 영향을 줌. 새하늘과 새땅은 이 세상에 이루어짐을 일원론적으로 생각해야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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