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속에서]
교회 - 이념의 성전
이렇게 볼 때 한국 교회에 복음의 진정성이 살아 있는지 질문하지 않을 수 없다. 일제 강점 때 신사 참배한 죄, 해방 이후 이념 대립 과정에서 잔혹한 학살극에 가담한 죄, 수많은 시민을 탄압하고 온갖 부정과 부패를 일삼는 독재 권력에 빌붙어 그들을 하느님의 이름으로 축복한 죄, 기독 정당의 명분으로 세속적 명리와 권력을 탐한 죄 등 이러한 교회의 죄악상은 묻어둔 채 신도들을 향해 회개를 강요하는 것이 오늘날 한국 교회의 모습이다.
집단적 범죄를 은폐하기 좋은 장치가 바로 개인주의다. 한국교회는 모든 신앙의 형태를 개별화시켜 집단으로부터 분리하려는 이중적 태도를 갖는다. 개인은 교회라는 공동체 안에 존재하지만 신앙은 각자의 몫으로 전가하여 교회라는 집단의 도덕성과 무관한 것처럼 치부해 버리는 것이다. 교회라는 집단의 도덕성이 구성원 개별자의 신앙과 무관한 것처럼 호도하는 것이다.
설교 - 소비되는 권위
하느님과 신도의 소통과 화해를 통해 하느님을 존중하고 높여 드리는 것이 예배의 궁극적 목적이라면, 예배 과정에 이루어지는 모든 의식은 하나의 절차나 수단에 불과하다. 설교 역시 이러한 목적에 봉사하는 하나의 수단일 뿐이다. 그러나 한국 교회의 예배 대부분이 설교에 집중되는 양상을 보인다. 예배의 절차와 과정이 설교를 중심으로 구성되고, 모든 절차가 설교를 위한 부속 수단으로 전락한다. 이러한 예배 구조는 예배자의 주체적인 참여를 방해하고 설교자와 청중을 이원화시킨다. 따라서 청자는 설교를 듣기 위해 예배에 참석하게 된다. 교회와 예배의 모든 권위가 설교자와 설교에 집중됨으로써 예배자들을 타자화하는 것이다. 설교자도 예배자의 한 사람일 뿐이다. 이것을 망각하면 제사장 이데올로기가 부활하게 된다. 강단의 설교가 현실을 이해하지 못하는 말의 향연으로 끝나게 마련이다.
복음 - 유니폼 크리스천의 액세서리
한국 교회는 순종을 명분으로 하는 굴종과, 성경적 권위를 가장한 목회자 권력이 성경의 진리를 제멋대로 요리하는 싸구려 음식점으로 전락한 것이다.
전도 - 제국주의자의 타자화 전략
그 한 번을 위해 전도자들은 물러서지 않는 것이다. 전도자는 인격적 모멸감 속에서도 하늘나라의 상급을 생각하며 행복한 미소를 짓는다. 그러나 전도자가 행복한 미소를 지을 때 피전도자는 기독교와 복음에 환멸을 느낀다. 전도자가 복음을 전파했다는 맘으로 편안히 잠들 때 피전도자는 기독교와 복음에 대해 스트레스 받고 피로감에 젖는다.
한국 교회는 복음주의에 대한 잘못된 이해와 해석으로 교회를 플라톤의 신전으로 전락시키고 있다. 영과 육은 절대 분리된 것이며, 선고 악이 영혼과 육체로 극명하게 나누어진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영성 - 싸구려 유행 상품
감성의 과잉을 영성으로 착각하여 그것에 충실하는 것은 초기 기독교에서 경계했던 이교적 제의 현상이다. 이러한 경향은 극단적 감정의 표출을 통해 영혼의 자유를 지향했던 고대의 디오니소스 축제와 같은 열광주의를 부추긴다.
쉽게 반성하고 또다시 쉽게 범죄하는 싸구려 감상주의식 회개가 한국 교회와 신도들에게 만성화됐다는 것을 반증한다.
성경은 여러 단계를 거쳐 재구성되고 번역된 텍스트다. 그런데 토씨 하나 의심하지 말고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야말로 성경을 샤면의 주술로 전락시키는 것이다. 문자에 어떤 영험한 능력이 있어 그것을 많이 읽는 것만으로도 하느님의 능력을 경험할 수 있다는 생각은 성경과 기독교를 저급한 샤머니즘과 마술성에 빠뜨리는 것이다.
채찍으로 갈기며 상을 뒤집는가 하면, 입에서 악한 욕설을 거침없이 내뱉었다. '이 독사의 자식들아'라는 말을 우리 식으로 표현하면 '이 개자시들아'정도가 될 것이다. 그러면 예수님의 행위는 과격하기 때문에 영적이지 못한가. 예수님 답지 못한 폭력 행위인가? 그렇지 않다. '영적'이라거나 '영성'이라는 말은 겉으로 드러나는 행위의 양상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내면의 진실성에 있다. 그 행위의 궁극적 지향점이 어디에 있느냐에 따라 다른 것이다. 그러나 한국 교회는 거룩한 분노를 죄악으로 여긴다. 때문에 구조적인 문제에 대해서는 보지 못하거나, 본다 하더라도 그것을 발설하지 말아야 하는 것으로 주입 받는다. 정직하고 올바른 태도로 교회와 목회자의 부조리에 '아니오'라고 말함으로써 거짓된 자아를 죽이는 것, 그것도 하나의 순교다.
헌금 - 윤리를 망각한 영혼의 환각
인간의 나약한 심리가 율법적 강제에 포획될 때 헌금이 본래의 목적을 상실하고 두려움과 공포심에 의한 반사적 행위가 될 수 있다.
제물(헌금)을 발복의 수단으로 삼으려는 하등 종교의 신(神) 관념이 한국 교회에 침투한 것이다. 이에 따라 지존자 하느님은 인간에게 제물을 요구하고 그에 따라 복이나 저주를 선택하여 내리는 저급한 잡신으로 추락하고 말았다. 한국 교회는 헌금을 먹고사는 저급한 잡신의 소굴, 아니면 몰렉의 신전이 되어 버린 것이다.
===========================================================================================
'대체복무제'는 노무현 정부 때 도입했다. 이러한 소수자에 대한 인권 등은 사실 거의 무관심했다. 양심적 병역거부 란 말을 들어도, ‘지네들만 특별하냐, 왜 튀려고 하느냐. 누군 몰라서 그렇게 안하느냐, 국가를 위해 개인의 이익은 포기하는 것이 당연한 것 아니냐’ 이런 식의 생각밖에 하지 못했다. 즉, 우리나라의 특수한 상황 때문에 군대는 당연한 국민의 의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총을 선택하는 대신 감옥을 선택한 여호와 증인에 대해서 이단의 특성 중 하나라고 생각했다. 일년에 수백명의 젊은이가 감옥에 들어가는데도 그것이 인권문제라고 생각지 않았다.
국가의 제도와 개인의 주권은 역사 이래 계속 싸워왔으나 현대 민주주의 사회에 와서는 국가 체제나 이념보다 개인의 자유와 인권이 우선시 되는 쪽으로 방향이 설정되고 있다. 그래서 서구의 많은 국가가 징병제 대신 모병제로 바꾸거나 대체복무제를 도입한다. 이러한 측면에서 최근 이명박 정부 들어서며 대체복무제가 무기한 보류되었다는 사실은 개인의 인권보다 국가의 이념이 중시되는 민주주의의 퇴행이라고도 볼 수 있는 것이다. 한국의 특수한 상황이라고 하지만, 정말 징병제 밖에 방법이 없는 것일까? 군대를 갔다 온다고 해서, 총이나 제대로 쏠 사람이 있을 것이며, 실제로 전쟁이 일어난다고 해서 그들을 활용할 수 있을까? 차라리 그만한 돈이라면 모병제를 하고 그 나머지로 최첨단 장비 및 기술 개발에 투입하면 되지 않을까? 한국의 특수한 상황이란 정치적 용어 아래 효율성을 따져 보지도 않고 우리는 쉽게 우리의 권리를 포기하고 있지나 않은가?
예수님이 '누가 내 모친이며 내 동생들이냐'라고 말씀한 바와 같이 '국가주의'는 명백히 신앙 아래에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국가주의는 하나님이 바라는 것에 반대되는 이념이라고 볼 수 있는 것 아닌가? 악한 자가 죽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돌아오기를 바라는 하나님의 마음을 생각할 때, 전쟁을 통해서 공공연히 합법적 살인을 하도록 조장하는 국가주의는 개인의 인권차원을 떠나서 그리스도인으로서 반대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저자는 이에 대해 이와 같이 말을 한다. "기독교는 국가와 합치될 수 없을 뿐더러 어떠한 형태의 체제나 이념에 복무해서는 안된다. 예수님의 삶과 가르침은 국가나 민족의 경계를 넘어 아니키즘을 지향하고 있기 때문이다".
대체복무제를 도입할 때 한기총이 반대했다는 것은 처음 안 사실이다. 그러나 그들이 그렇게 극렬히 반대한 이유도 납득할 만하다. 결국 대체복무제를 찬성한다면, '여호와의 증인'의 교리를 인정해주는 꼴이 되는 것이고 국가와 제도를 초월한 정의에 대한 담론의 주도권이 여호와의 증인에 넘어감으로써 담론의 주도권을 상실하게 될 수 있다는 우려가 깔려있기 때문인 것이다. 여호와의 증인이 이단이라고 나는 세뇌 당한 듯하다. 물론 특정부분은 이단이라고 할 만한 것이 있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국가주의는 예수님이 지향하는 것과 반대된다는 점에서 볼 때 어쩌면 군대거부라는 면에서는 그들이 옳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slightly 든다.
요즘의 시국선언을 보자. 각 학계, 종교계(불교), 심지어 외국 대학에 있는 한국인 및 외국인 교수까지 현 사태를 민주주의의 심각한 후퇴라고 보며 시국선언을 줄이어 하고 있다. 그러나 기독교를 대표한다는 한기총, 한국교회 원로들은 이제야 겨우 시국선언을 할뿐더러, 그들이 주장하는 내용도 지금과 같은 어려운 시기에 소수의 시국선언을 통해 국가에 혼란을 조장하지 말고 국민적 화합이 필요한 때라고 주장 하며, 대한민국 정체성과 법질서를 수호해야한다는 성명서를 내는 형편이다.
기독교를 대표한다는 그룹이 용산참사 등 약자, 소수를 위한 대변이 필요할 때에는 조용히 있다가 대체복무제나 시국선언 등 기득권자 및 권력을 옹호하는 것에는 적극적인 또한 기회주의적인 모습을 보이는 것 같아 안타깝다.
이 책을 통해 다수가 늘 옳은 것은 아니라는 것과 말씀에 비추어 옳다면 지금까지 고집해왔던 것을 버리고 그것을 채택하는 용기가 필요하다는 것을 배운다. 무엇보다 맹목적으로 생각 없이 다수를 좇았던 나를 반성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