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 훈련
(노이로제와 성격장애)
성격장애자들이 자신들 문제에 대해 배우자, 자녀, 친구, 부모, 고용인, 환경, 학교, 정부, 인종차별주의, 남녀차별, 사회제도와 같은 외부에 책임을 돌리며 비난하는 한, 문제들은 해결되지 않은 채 남아 있을 것이며 아무것도 성취할 수 없게 될 것이다. 자기들의 책임을 내던져 버림으로써 그들 자신은 편안할지 모르나 삶의 문제를 해결하는 일을 포기하고, 영적 성장이 멈추게 되고, 사회는 쓸모없는 짐만을 떠안는 꼴이 되고 만다. 결국 성격장애자들은 자기들의 고통을 사회에 던져 주는 것이다. "네가 문제 해결에 참여하지 않으면 네가 문제의 일부가 되고 말것이다"라는 격언에 주목하라.
(포기는 부활이다)
두 장군이 자기 휘하 군인들을 전투에 나가게 할 것인지 아닌지 각각 결정을 해야 한다고 상상해 보라. 한 장군에게는 군단이 전략의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다른 장군은, 전략의 도구라는 점도 인정하지만 각 개인의 생명을 일일이 인식하고 있고 또 각 개인의 가족의 생명까지도 일일이 인식하고 있다. 어떤 장군이 결정을 더 쉽게 할 수 있을까? 인식을 어리숙하게 하는 장군이 더 쉬울 것이다. 그 이유는 정확히 말해서, 보다 완전하게 인식하는 것에 따르는 고통을 견뎌 낸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제4부 은총
(엔트로피와 원죄)
"왜 우리에게 선악과를 먹지 말라고 하셨는지 궁금합니다. 우리는 이곳에 사는 것이 정말 좋아서 은혜를 배반하고 싶지 않은데, 이 율법만은 정말 이해하기 힘듭니다. 설명해 주신다면 감사하겠습니다." 물론 그들은 그런말을 하지 않았다. 그들은 그 율법 뒤에 숨은 이유를 알아보려고 하지 않았고, 하나님의 권위에 의문을 제기하거나 직접 도전해 보려 하지도 않고, 어른답게 대화해 보지도 않고서 그냥 율법을 깨뜨렸다. 그들은 뱀의 말은 경청했지만 행동에 들어가기 전에 하나님의 말을 되새겨 보지는 않았다. 왜 그랬을까? 유혹받고 행동하게 되기까지 그들은 왜 아무 일도 하지 않았는가? 죄의 본질은 바로 이 아무 일도 하지 않은 것에 있다. 즉 토론의 단계를 생략해 버린 것이다. 아담과 이브는 뱀과 하나님 사이에 논쟁을 붙였어야만 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음으로써 하나님 쪽의 답변은 듣지 못했다. 마음 속에서 선과 악 사이의 논쟁을 붙여보려하지 않는, 혹은 힘을 다하여 싸우지 않는 그러한 태도가 바로 죄를 짓게 하는 원이이다. 바로 게으름 때문이다. 자기 내면 속에서 논쟁을 벌이는 것은 일종의 일이다. 그러므로 원죄는 존재한다.
은총이 인간의 진화라고 하는 사다리로 우리를 밀어 올리는 궁극적인 힘의 원천인 것처럼 엔트로피는 우리로 하여금 그 힘에 저항하여 지금의 편안한 사다리의 아랫단으로 내려가도록 부추긴다. 은총에의 부름은 곧 보다 더한 책임과 권력이 있는 지위로 승진하는 것과 마찬가지이기 때문에 부름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이 적은 것이다. 또한 그것은 사랑으로 세상을 돌보고 수고하는 삶에의 부름이며, 봉사와 희생이 요구되는 삶에의 부름이다. 그것은 영적으로 어린이 상태에서 어른의 상태로 나아가라는 부름이며, 인류의 부모가 되라는 부름이다.
(은총에 저항하는 사람들)
"그 망할 놈의 생각을 언제나 해야한다는 것은 참을 수 없어요. 나는 더 골치 아프게 살려고 여기 온 것이 아니란 말예요. 좀 더 긴장을 풀고 자신을 즐기면서 살고 싶단 말예요. 선생님은 제가 하나님 따위라도 되길 바라시나 보죠!"
대부분의 사람들이 은총에 저항하는 주된 이유는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가르침 중 '근면하라'는 부분 때문이다.우리들 대부분은 어린이나 청소년과 마찬가지로 어른다움에 따르는 자유와 권력이 우리들의 것임을 알면서도 그에 따르는 책임과 자기 훈련은 별로 하지 않으려 한다. 우리는 부모나 사회, 혹은 운명이 우리를 억압한다고 느끼지만, 사실은 우리의 지금 상태를 대신 책임져 줄 윗사람을 필요로 한다. 우리 자신 말고는 탓할 사람이 없는 그런 권력의 정상에 올라간다는 것은 두려운 일이다. 그 정상에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지 않는다면 우리는 고독에 질려버리고 말것이다. 자기 인생이라는 배의 고독한 선장이 되기 보다는 책임감이 없는 상태를 택하려 할 것이다. 그러므로 '부름받은 자는 많지만 선택받은 자는 적다'라는 말은 은총에의 부름에 응답하기가 그토록 어렵다는 것을 감안하면 쉽게 설명된다.
우리가 은총을 선택함과 동시에 은총에 의해 선택된다고 하는 역설은 초능력이라고 하는 것의 본질이다. 부처는 해탈하려는 노력을 멈추었을 때 깨달음을 얻었다. 해탈이 그에게 오도록 한 것이다. 그러나 한편 그가 해탈을 얻기 전 적어도 16년간이나 그것을 찾아 헤매었으며 16년간이나 그것을 위해 준비해 왔기 때문에 해탈이 그에게로 왔다는 사실을 누가 의심할 수 있을까?
(진화의 기적)
[열역학 제2법칙에서 에너지는 언제나 보다 정돈된 상태에서 덜 정돈된 상태로, 보다 복잡한 분화 상태로부터 보다 단순한 분화 상태로 흘러간다. 일예로 낮은 곳으로 흐르는 시내물이다. 이 과정을 거꾸로 돌려 놓으려면 펌프, 수문, 양동이로 퍼올리기와 같은 에너지나 일이 필요하다. 따라서 우주는 수백만 년의 세월동안 아래로 흘러내리기만 하여 마침내는 모양도 없고 질서도 없는 점액질이 되어 버려 더 이상은 어떤 운동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한다. 이러한 완전 해체와 미분화된 상태를 엔트로피라고 부른다. 진화의 흐름은 이 엔트로피의 힘과는 정반대이다. 진화의 과정은 유기체가 단순한 분자구조로부터 보다 고차적인 복합구조, 즉 분화되고 정돈된 상태로 나아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진화의 과정은 바로 기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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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적 성장으로 가는 길은 끊임없이 생각해야 하고, 수고해야하는 일이다. 그러한 길은 자신의 노력(의지)과 엔트로피에 저항할 수 있는 은총 둘다 결부되어야만 갈 수 있을 거라 한다. 원죄가 게으름이라는 것은 공감이 많이 간다. 엔트로피의 힘에 따라 그리고 원죄인 게으름에 따라 에너지가 필요한, 일을 할 필요가 없는, 즉 사다리를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한단계 내려가는 길을 택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단순히 가까운 예로 이 책을 읽고 나서 하나의 줄거리를 짜고, 둥둥 떠다니는 단어들을 -게으름, 원죄, 은총 등- 서로 연결하고, 이해한 것을 풀어쓰고, 맞는지 확인하고 정리하는 작업을 하고 싶지 않다. 생각을 하기 싫단 말이닷!
막중한 책임을 가진 자리에 앉기 보다는 만년 평사원이 속편하지 않은가!(물론 어떤 직종에서는 위로 올라갈수록 파워는 세지지만 책임은 없기 때문에 그 자리에 올라서려 기를 쓰는 곳도 있다)
성장하기를 원치 않는것이다. 주된 이유로 책임과 고독감, 그리고 끊임없는 수고란 것에 동의한다. 그리고 한때 노력으로 성장이, 모든 것이 가능하다고 믿었으나, 그것이 나만의 의지로서는 되지 않음을 안다. 느낀다. 이러한 본성에 거스르는 일은 은혜가 없이는 어려움을 인식한다